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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빌라왕’ 사건 때 발의한 30개 법안, 절반 넘게 ‘낮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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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호 03면

민생 외면 정치권, 전세사기 늑장 대응

김민석 더불어민주당·박대출 국민의힘·김용신 정의당 정책위의장(왼쪽부터)이 21일 전세사기 대책 마련을 위한 회동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김민석 더불어민주당·박대출 국민의힘·김용신 정의당 정책위의장(왼쪽부터)이 21일 전세사기 대책 마련을 위한 회동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근저당이 1억4000만원 있지만 시가는 2억5000만원이니 안전하다는 공인중개사의 말에 6200만원에 전세계약을 했습니다. 어제(19일) 경매에서 1억1300만원에 낙찰됐는데, 최소변제금 2200만원을 제외하고는 받을 길이 없네요.”(인천 미추홀구 조모씨)

“지난해 피해가 본격화되면서 경매를 중지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한국도시주택공사(LH)에서 우리 매물을 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별 답이 없었고, 구청장은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뒤늦게 정부와 국회에서 대책을 마련한다는데 희망고문으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미추홀구 전세사기대책위원회 김병렬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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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사기 피해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대안은 국회에서 잠잔다. 전세 세입자들의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질 것 같다.

여야 3당(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정의당) 정책위의장은 21일 국회에서 만나 전세 사기 대책 입법 방안을 논의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여야 3당이 전세 사기 피해자의 어려운 사정을 하루 빨리 정상화하기 위해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오는 27일 예정된 4월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경매로 매각된 전세 사기 피해자 주택의 임차보증금을 지방세보다 먼저 변제하는 지방세기본법을 비롯한 전세 사기 피해 대책 법안을 합의처리하는데 공감대를 이뤘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반면 민주당은 정부·여당이 전날 추진하겠다고 밝힌 우선매수권도 입법을 서두르자는 입장이다. 김민석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우선매수권 추진을 위해 밤샘 작업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되도록 빨리 추진하겠지만, 임차인과 경매낙찰자의 권리관계를 조정하는 등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외에도 민주당·정의당은 정부의 공공매입을 전제로 하는 ‘선(先)보상, 후(後)구상권 청구’ 법안 처리도 주장하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공공기관이 전세보증금 채권을 인수해 피해 금액을 우선 보상하고, 이후 해당 주택을 인수해 공공임대주택으로 활용하거나 매각하는 방식으로 피해보상에 쓴 돈을 회수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총론은 같지만, 각론은 제각각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은 이날 “LH의 매입임대제도를 사기 피해 물건에 대해 우선 적용하겠다”면서도 “보증금 반환은 선순위 채권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대출 의장도 “사인 간 발생한 채무를 공적 재원으로 대신 변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국민 부담으로 전가된다”고 밝혔다. 반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초부자들에게는 수십조원씩 세금을 뭉텅뭉텅 깎아주면서 전세 사기 피해자 선구제를 망설이는 것은 참으로 못된 태도”라며 “보여주기식 땜질 처방으로 피해자들을 우롱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하반기 전세 사기 문제가 불거지면서 여야에서 발의한 30여개의 피해구제와 재발 방지 법안 가운데 절반 이상이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체납 세금보다 임차인의 보증금을 먼저 돌려주는 국세기본법 개정안은 올 1월부터 시행됐지만, 지방세기본법은 아직 개정되지 않았다. 전세금을 상습적으로 돌려주지 않는 나쁜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는 주택도시기금법, 세금 체납시 임대사업자 등록을 불허하는 민간임대주택법등도 지난 2월에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결국 며칠 사이에 정치권에서 합의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는 의미다.

게다가 우선매수권이나 공공매입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문제다. ‘깡통전세’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우선매수권 부여나 공공매입이 가능하지만 전세 사기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전세 사기범은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지만, 전세 계약 자체는 민간 계약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보상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을 비롯한 사기범들은 한 물건을 두 번 팔아먹었다. 은행에 담보로 제공한 뒤 대출을 받고, 임차인에게 전세를 주며 보증금을 받았다. 은행의 근저당과 임차인의 확정일자 사이에 우선권을 따져 한쪽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우선권에서 밀리는 쪽은 사기범에게 민사소송을 통해 받아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특히 아파트에 비해 가격 산정이 어려운 신축 빌라나 오피스텔은 이같은 전세 사기의 대상이 되기 쉽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전세 사기의 경우 공공매입을 하더라도, 세입자가 선순위가 아니면 구제가 어렵다”며 “세입자에게 손해없이 보증금을 돌려줄 정도라면 시세보다 엄청 비싸게 매입해야 하는데 가능하겠나”고 말했다. 그는 “세입자들이 내쫓기지 않도록 저리에 돈을 빌려서 그 집에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우선매수권을 적극 검토하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말했다. 반면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저리 지원은 이미 가진 빚에 또 빚을 내는 것 아니냐”며 “궁극적인 대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송 대표는 현재 8% 수준인 공공임대주택 비중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5%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장기 대안으로 내놨다.

중장기적으로는 전세대출을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문도 연세대 정경대학원 겸임교수(한국부동산경제협회장)는 “전세대출을 금지하고, 공인중개사 페널티를 강화하면 전세 사기의 상당 부분은 정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권의 전세자금대출 규모는 지난해 말 170조원을 넘어섰다. 3년 새 70조원이 늘었다. 금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건전성 관리를 위해 전세대출에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세대출은 임차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상품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임대인의 갭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꼴이 돼 버렸다”며 “DSR을 적용하면 무분별한 대출에 제동을 걸어 중장기적으로 전세 수요와 가격의 급격한 상승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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