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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시간 노력해야 전문의 되는데, 공공성 강조해 ‘홀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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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호 28면

러브에이징

21세기 대한민국의 의과대학은 이공계 인재를 흡수하는 블랙홀이다. 성적 상위권 1% 이내 학생들이 지원한다. 학원가에는 ‘초등부 의대 준비반’도 존재한다. 거의 병적으로 보이는 의대 진학 열풍이다. 과연 한국 의사는 영재들이 집중적으로 선망할 만한 직업일까.

첨단 현대 의학을 발달시킨 서구 사회는 전통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다루는 신학, 사회적 생명을 규정하는 법학,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 등 세 분야는 사회적 존경을 받는다.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성직자, 법률가, 의사도 존중한다.

종합병원 전문의 취직할 때 되면 불혹

반면 한국에서는 오랜 세월 정부가 앞장서서 의사를 무시하고 비난해왔다. 문재인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의사는 공공재(公共財)’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공공재란 공중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이다(표준국어대사전).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를 물건으로 취급한 셈이다.

언론도 의사 비난에 앞장서 왔다. 의사에 대한 한국인의 복잡한 심리를 자극해 카타르시스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픈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는 안정된 고수익이 보장된다는 식의 선동적인 내용은 의대 진학을 부추기는 작용을 한다. 일례로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를 인용하며 2020년 기준 의사 평균 임금은 2억3070여만원이지만 S그룹의 ‘등기임원을 제외’한 임직원 평균 연봉은 1억4000만원이라는 식이다. 과연 옳은 평가인가. 우선 통계에서 제외한 S그룹 등기임원의 평균 연봉은 77억이 넘는다. 또 2억원대 연봉을 받는 의사의 평균 연령은 47.9세다. 만일 47.9세 전문의 평균 연봉과 S그룹 47.9세 임직원 평균 연봉을 비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어떤 분야건 최소한 1만 시간의 훈련을 해야 전문가가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앤더슨 에릭슨이 제시한 ‘1만 시간의 법칙’이다. 1만 시간을 채우려면 매일 3시간씩 10년, 혹은 하루 10시간씩 3년을 투자해야 한다.

1% 이내 성적으로 의대에 입학한 학생도 의학 공부를 하루 10시간씩 6년(평균 7년 후 졸업), 즉 2만 시간은 투자해야 졸업할 수 있다. 의사가 된 이후에도 전문의가 되려면 4~5년간 1주일에 80시간씩 최저시급을 받으면서 2만여 시간 동안 병원에서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후에도 세부 전공 분야의 펠로우를 하면 또 1만 시간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종합병원 전문의로 취직할 때는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전문의가 된 이후에도 한국의 왜곡된 의료 시스템에 적응 못 하면, 특히 전공이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필수 진료과인 경우에는 봉직의 때 명의 소리를 들었어도 개원해서 적자에 시달릴 위험이 상존한다. 정부 정책이 필수 진료는 원가 보상을 못 해주겠으니 각자 재주껏 환자에게 비보험 검사나 치료를 해서 손실도 보상하고 수익도 올리라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개원가 노하우(?)를 신속하게 익혀야 한다.

한국 사회가 의사를 대하는 시각은 유교를 근간으로 직업의 귀천을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분류한 조선 시대에 뿌리를 둔다. 조선판 카스트 제도인 사농공상을 양반들은 ‘각각 자기의 분수가 있으므로 선비(士)는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고 농부는 농사, 기술자는 공예, 상인은 상업에 종사하며 뒤섞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의사의 지위는 ‘비록 의술이 화타(중국의 전설적인 명의)처럼 뛰어난 무리라도…(중략)…그 일이 천(賤)하여 사대부에 열기할 수 없다’ 는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성종실록 140권, 성종 13년 4월 15일 中).

일본, 의학 지원 덕에 노벨상도 5명 받아

같은 동아시아 국가지만 직업의 차이를 신분의 구분 대신 분업으로 여겨 고급 기술자를 우대하는 일본과도 대조적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부터 국가 정책으로 서양의학을 지원한 덕분에 지금까지 현대 의학 분야에서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미국과 유럽이 휩쓰는 노벨 생리의학상도 1987년 이후 일본인 수상자가 다섯 명 나왔다.

사농공상 철학으로 사대부가 모든 분야를 통치했던 조선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래도 500년 이상 지속한 문화적 뿌리는 자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대부 자리를 대신한 대한민국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지난 30년 이상 지속해서 고급 기술자인 의사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필수 의료 분야를 홀대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선진국 의사보다 5배 이상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면서 한국 의료를 발전시켜 왔다. 지금 한국의 진료 접근성과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의료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8.8%에 불과하다. 공공성을 강조해 의료비 지출은 적지만 진료 대기 시간이 길기로 악명 높은 영국도 의료비가 GDP의 11.9%를 차지한다〈표 참조〉. 한국의 필수 진료과 의사들은 자신들이 수십 년에 걸쳐 피나는 희생과 노력을 한 덕분에 국내 GDP 3.1% 이상을 절약시켰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관대작을 비롯한 많은 사회 구성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묵묵히 일했던 의사들은 이런 사회 분위기를 알지만 이미 흘러간 세월이니 어쩔 수 없다며 탄식한다.

반면 최근에 의사가 된 MZ 세대는 윗세대와 달리 필수의료를 전공하고 싶을 땐 첨단 의료가 궁금하면 미국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원할 땐 수입과 업무량이 모두 적은 영국으로, 한국에 자주 오고 싶으면 일본으로 가는 식으로 다양한 국가에 조용히 진출하고 있다. 이게 2023년 한국의 필수의료가 처한 현실이다.

성적 상위 1% 이내에 드는 공부에 재능 있는 학생이라면 어느 분야건 4~5만 시간을 투자하면 의사 못지않은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막연히 좋아 보여서 선택하기에 의사의 길은 투자해야 할 시간이 너무 많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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