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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은 과도함의 적” 포도주는 왜 ‘원샷’ 하지 않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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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호 26면

와글와글, 와인과 글

프랑스 상파뉴 지방에 위치한 브리야 사바랭 이름 기리는 분수와 동상.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 상파뉴 지방에 위치한 브리야 사바랭 이름 기리는 분수와 동상. [사진 위키피디아]

요리용 칼로 도마 위를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와 우리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 소리인가?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는 믿고 받아들인다는 수용의 의미다. 이처럼 소중한 식사와 요리이지만 일부에서는 그 의미가 바뀌어 가고 있다. 단순히 위의 허기를 채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먹는 행위를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으로 확장 중이다. 유튜브에서는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해치우는 대식가들의 먹방 영상이 올라오고 변종 요리 레시피를 선보이는 쿡방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원초적인 식욕과 놀이 욕망을 자극한 프로그램이다. 반면 한 끼에 30만 원이 넘는 오마카세 식당이나 파인 다이닝을 내세우는 고급식당들도 적지 않다. 결핍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 것인가?

먹는 행위의 본질을 되돌아보기 위해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예찬』을 다시 읽는다. 음식과 와인이라는 주제를 철학과 문학, 생리학에 적용해 풀어나간 것으로 원래의 제목은 ‘미각의 생리학’이다. 음식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서술한 책으로 요즘도 많은 저자들이 인용하는 고전이다. 저자는 요리사가 아니라 판사 출신 법률가라는 점이 특이한데, 프랑스 혁명 때 왕당파로 몰려 미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인물로, 사망 직전인 1825년에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음식에 관해 글 쓰는 사람들이 종종 인용하는 잠언도 이 책에 적혀 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소.”

그렇다. 먹는 것을 보면 곧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미식학 혹은 미식법을 의미하는 ‘la gastronomie’란 프랑스어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것으로 위장을 뜻하는 가스테르(gaster)와 법칙을 의미하는 노모스(nomos)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미식의 정의는 무엇일까? “미식은 미각을 즐겁게 하는 사물에 대한 정열적이고 사리에 맞는 습관적인 기호다. 미식은 과도함의 적이다. 폭식, 폭음하는 모든 사람은 미식가의 명단에서 제명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우아함과 섬세함, 통찰력과 심오함의 결합이 미식이며 대식이나 식탐은 미식과 확실히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요즘 넘쳐나는 ‘먹방’ 프로그램과 경쟁적인 과시적 소비행태는 미식과 거리가 멀다. 폭식과 폭음을 경계하는 문장을 이 책에서 자주 발견한다. “소화를 못할 때까지 먹거나 취할 때까지 마시는 사람은 먹을 줄도 마실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여성은 아름다움과 미식에 본능적이고 호의적이며, 그렇기에 미식을 실천하고 있는 아름다운 미식가를 보는 것만큼 유쾌한 일도 없다고 그는 적고 있다. 반면 유럽 대륙을 석권하다시피 했던 나폴레옹은 미식가가 아니었다. 전쟁을 치르느라 식사를 매우 불규칙하게 했고 빨리 먹었다. 식사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 한국의 일부 리더들도 미식가와 거리가 멀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세대들에게 식사는 위장의 허기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고 1분이라도 빨리 일터로 복귀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프랑스인답게 포도주를 ‘가장 사랑스러운 음료’라 표현하고 있으며 집으로 손님을 초대할 때 음료와 술의 순서에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해야 미식의 진가가 나타난다고 한다. 포도주는 왜 한 잔을 벌컥 들이키지 말고 조금씩 음미하며 마셔야 하는가. 그는 미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삼키는 것을 멈추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포도주의 특수한 향기를 진정으로 맛보고 감식하고 발견할 수 있다.” 즉 한 번에 잔을 비웠더라면 느낄 수 없었을 온전한 쾌락을 느끼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예찬』(원제는 미각의 생리학). [사진 위키피디아]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예찬』(원제는 미각의 생리학). [사진 위키피디아]

좋은 와인의 예로 샹베르탱(Chambertin)을 들고 있는데, 부르고뉴 지방의 ‘황금 구릉’이라는 뜻을 지닌 코트 도르에서 생산되는 레드와인을 말한다. 보르도 지방의 샤토 라피트, 부르고뉴 지방의 클로 부조(Clos-Vougeot) 등 명품 와인 이름도 당연히 언급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질 나쁜 와인으로 쉬렌(Suresnes)을 들고 있는데, 파리에서 약 8㎞ 떨어진 마을에서 생산하던 포도주다. 우리의 혀는 감각이 점점 무뎌지기에 셋째 잔 이후로는 아무리 좋은 포도주라도 무딘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고대 그리스의 향연에서는 오늘날과 반대로 더 좋은 포도주를 따를 때마다 점점 더 큰 잔을 사용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고전들을 미식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한 점도 흥미롭다.

나폴레옹이 패하고 유럽 대륙의 운명을 재편하는 빈 회의가 열렸을 때 맹활약한 프랑스 대표 탈레랑과 미식의 관계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다. 탈레랑은 당대 최고의 요리사였던 마리-앙투안 카렘 등 요리사들을 대동하고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회의에 참석해 진귀한 요리와 샴페인, 고급 포도주를 곁들여 세련된 접대로 각국 대표단의 입맛을 사로잡음으로써 패전국 프랑스의 국익을 지켜냈다. 입이 즐거우면 마음이 열리고, 귀도 열리고 생각도 열리는 법이니까. 프랑스에서 탄생했다는 ‘유혹의 기술’(la coquetterie)을 활용할 줄 알았던 외교의 달인이었다. 반면 빈 회의 이후에는 프랑스 수프인 포타주에 이탈리아 치즈 파르메산를 갈아 넣고 드라이한 마데이라 포도주를 곁들이기를 좋아했다는 일화도 적고 있다. 마데이라는 대서양에 떠 있는 포르투갈의 섬으로 축구 스타 호날두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항해시대 이곳 와인은 인기가 높았다.

요리는 문명 생활에 가장 크게 공헌한 기술이라는 사바랭의 성찰과 “동물은 삼키고, 인간은 먹고, 영리한 자만이 즐기며 먹는 법을 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따분한 이론으로 가득할 것 같지만 의외로 재치 있는 어록도 곳곳에 남겨 두었다. “요리사의 가장 필수적인 자질은 시간 엄수다. 그것은 동시에 손님의 필수 자질이기도 하다.” 미식이란 결국 배려라는 뜻이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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