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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짐 무거워 에너지 바닥” 다시 날아오르는 ‘강철나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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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호 16면

사상 첫 4연임,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국립발레단 61년 역사상 최초로 4연임 단장에 오른 발레리나 강수진. 최영재 기자

국립발레단 61년 역사상 최초로 4연임 단장에 오른 발레리나 강수진. 최영재 기자

2013년 말. 공연계는 이듬해 국립발레단장으로 국보급 발레리나 강수진이 온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꼭 10년 만인 2023년 4월, 강수진은 또 한 번 빅뉴스의 주인공이 됐다. 국립발레단 61년 역사상 최초로 4연임 단장이 된 것이다. 비좁은 무용계에서 국립단체장 직을 장기 집권하게 됐지만, 반대 목소리는 없었다.

지난 9년간 ‘강수진의 국립발레단’은 조용히 성장했다. 세계적 스타가 진두지휘 하니 공연은 늘 매진 사례다. 내실도 탄탄해졌다. 존 크랑코·조지 발란신·프레데릭 애쉬튼·윌리엄 포사이스 등 발레사에 큰 획을 그은 전설적 안무가들의 작품 공연권을 따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해적’ 등 동시대 관객 눈높이를 고려한 고전 재해석도 활발했다.

한국적 창작발레 개발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단원 대상의 안무 프로젝트 ‘KNB무브먼트’를 꾸준히 진행해 강효형·송정빈 등 ‘해외 수출 안무가’를 배출한 것은 큰 성과다. 특히 송정빈이 재안무한 ‘해적’은 5월 발레 강국인 독일과 스위스 투어에 나선다. 국립발레단이 발레 선진국에 돈을 받고 초청받는 건 처음이다. 맹목적으로 ‘한국적’ 창작을 고집한 게 아니라, 세계인에게 친숙한 클래식 발레를 우리 식으로 재창작한 결과다.

국립발레단 61년 역사상 최초로 4연임 단장에 오른 발레리나 강수진. 최영재 기자

국립발레단 61년 역사상 최초로 4연임 단장에 오른 발레리나 강수진. 최영재 기자

악플 문화, 무용수들 상처받아

지난주 공연된 송정빈의 두 번째 재안무작 ‘돈키호테’도 호평 일색이다. 익숙한 고전이지만 국립에선 2014년 이후 공연된 적 없었는데, 확 세련되어진 프로덕션이 그간 강수진이 변화시킨 발레단의 수준을 말해주는 듯 했다. 강 단장은 “국립만의 ‘돈키호테’가 탄생했다”면서 “관객 입장에서 지루한 면이 있는 고전을 하이라이트는 살리면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한 결과”라며 뿌듯해 했다.

안무가 육성이라는 빅픽처가 있었나요.
“제가 슈투트가르트에 오래 있으면서 거장들이 나오는 과정을 지켜봤잖아요. 국립에 오면서 발레단 안에서 훌륭한 안무가를 키우는 게 꿈이었죠. 교류가 중요한 시대고, 단체마다 달라야 교류가 잘 되거든요. 강효형의 작품도 뭔가 다르기에 칠레·캐나다에 초청받았고, 송정빈의 ‘해적’도 고전이지만 우리만의 다름을 인정받아 초청받았어요. 한국이 해외 발레단을 많이 초청하는데, 우리도 더 많이 초청받으면 좋겠어요. 조금씩 결과가 나오고 있는 지금이 시작이죠.”
발레 강국의 초청은 의미가 남다르겠죠.
“클래식 재안무로 가는 것이라 더 그래요. 색다른 창작 모던 작품이 초청받을 땐 부담이 없지만, 클래식은 전세계가 공통으로 갖고 있으니 퍼포먼스가 중요하죠. ‘해적’은 마고 폰테인과 누레예프가 춘 이후 그랑파드되가 유명하지만, 자주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라 우리만의 것으로 발굴하자는 의도였어요. 어떤 반응이 나올지 걱정도 돼요. 레전드 안무가들도 초기에는 다른 나라에서 혹평을 받곤 했거든요. 그런 안무가의 여정이 국립에서 시작됐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어요.”

9년 전 현역 무용수 신분으로 국립발레단에 부임했던 강수진의 표정은 마냥 해맑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어깨가 무겁다”는 말도 자꾸 했다.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르던 무대에서 내려와 짊어진 ‘리더의 짐’은 중력을 고스란히 받은 듯 했다. 그간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코로나 시국에 발레단 운영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선화예중 1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이래 “오직 발레”였던 그에게 그 중력은 분명 낯선 것이었다. 지난해 퇴임 의사를 분명히 밝혔지만, 문체부의 거듭된 설득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평생 쉬는 게 어색했는데,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봐요. 처음으로 좀 쉬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현역 때는 개인 문제만 이겨내면 됐지만, 리더로선 다르더군요. 스스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너무 몰아붙였던 것 같아요. 스위치를 끌 줄 몰라 집에서도 발레단 걱정만 했으니 에너지가 바닥난 거죠. 그런데 저는 바닥까지 치고 다시 올라가는 성격이거든요. 영광스런 제안을 받고 스튜디오에서 재충전하기로 결심했죠. 사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스튜디오거든요. 바깥 세상과는 참 다른 세계인데, 거기서 무용수들과 함께 있는 게 즐거워요.”

14일 오후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중앙SUNDAY가 인터뷰 했다. 최영재 기자

14일 오후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중앙SUNDAY가 인터뷰 했다. 최영재 기자

30여년만에 한국 예술계 적응도 쉽지 않았겠죠.
“어떤 단체나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인내가 필요해요. 예술은 길게 봐야 하고 순간적으로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은 좀 다르더군요. 과도한 악플 문화에도 놀랐어요. 발레단이 공격받기도 했고, 무용수들도 상처를 받곤 하죠. 나름의 자유로 표현을 하는 것이겠지만,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서 익명으로 한다는 게 이상하고, 큰 상처를 받는 사람이 많은데 왜 개선되지 않는지도 궁금해요. 이런 게 당연해진 세상이 안타깝고요.” 

‘강철나비’라는 별명대로 그는 ‘강철멘탈’이다. 인간적인 고민을 들춰보려 해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며 철벽을 친다. 80년대 독일 발레단에서 7년간 군무진에 머물렀지만 “동양인 핸디캡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고 했다. “오히려 질투가 있었죠. 모나코 기숙사에서 친구들의 장난 때문에 허리에 큰 부상을 당한 적도 있고,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동료의 방해로 중요한 공연을 망친 적이 있지만, 견뎌야 할 과정이었다 생각해요. 힘든 건 음식이었죠. 한국에서 밥과 김치 외에 간식이라곤 초콜릿·왕사탕 정도 먹었거든요. 치즈도 못 먹어보고 가서 기름진 음식 때문에 엄청 고생했죠. 우체국까지 걸어가서 엄마에게 콜렉트콜을 걸면 엄마는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잘 잡아주셨어요. 선생님한테 혼나면서 억지로 먹다 보니 치즈도, 버터도 좋아하게 됐죠. 선생님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중요해요.”

80년대 독일 발레단 시절 질투 겪어

‘좋은 선생님’의 역할을 늘 강조하십니다.
“발레를 늦게 시작해서 한참 뒤처져 있던 제가 여기까지 온 게 선생님들 덕분이니까요. 저를 모나코로 데려가 준 마리카 선생님은 엄격했지만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저를 돌봐 주셨어요. 남편도 좋은 선생님이었죠. 89년에 만났으니 발레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쭉 함께 했는데, 남편 덕에 발레에 재미를 잃지 않고 오랫동안 춤출 수 있었어요. 재미만 느끼면 알아서 잘하게 되거든요. 제 연습과정은 딱 영화 ‘록키’였는데, 곁에서 끌어준 선생님들이 있어서 힘들지 않았어요. 이 자리가 무겁지만 다시 힘을 낸 이유죠. 저도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으니까요.”

그는 지난 5일 임명장을 받으며 “앞으로 초중고 무용 교과 채택 등 문화정책에도 목소리를 내겠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발레단에만 집중해 온 그로선 놀라운 발언이었는데, 바로 실천에 나선다. 27일 국회에서 열리는 ‘국립무용원 건립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기조 발제를 맡은 것이다. “어릴 때 정서적 교육이 중요하잖아요. 스폰지 같은 두뇌에 예술을 입력하며 자라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은 큰 차이죠. 학교에서도 모든 것에 부담 느끼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무용시간이 주어진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예술가들에게 발판이 되는 공간도 있어야 해요. 순수예술이 발전하려면 전초기지가 필요한데, 선진국으로 간다면서 그런 게 없는 게 놀라워요. 이런 디지털 세상에서 문화예술이 주는 감동이 없다면 인간의 감정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동물보호 앞장서고, 오드리 헵번처럼 봉사하며 살고 싶어”

1997년 강수진의 발.

1997년 강수진의 발.

강수진은 50대 중반인 지금도 몸무게 49kg에 종잇장처럼 얇은 허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침에 오랫동안 습관이 된 스트레칭을 짧게 하는 정도인데, 몸은 덜 써도 에너지를 뇌로 쓰는 게 큰 것 같아요. 발 모양이요? 굳은살이 없어지니 한결 나아졌어요. 발톱이 몇 개 없어서 페디큐어는 못하지만 훨씬 예뻐졌죠.(웃음)”

사실 강수진은 어딘지 요즘 사람 같지 않은 구석이 있다. 오랜 세월 ‘천상계’에 머문 탓인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해외에 있을 때 유일한 취미가 한국 드라마를 보는 거였어요. 그 중 ‘대장금’이 있었는데, 자꾸 보다 보니 언어가 달라졌어요. 내 입에서 ‘황송하옵니다’ ‘아뢰옵니다’ 같은 말이 나오길래 놀랐죠. 입력되는 한국어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는 아이를 낳은 적 없지만 “자식이 있다”고 했다. 귀국 후 8년째 기르고 있는 강아지 ‘써니’다. 독일에서 16년간 길렀던 고양이 ‘술탄’을 비롯해 강아지 ‘캔디’ ‘킹콩’과의 이별이 가장 힘들었다는 그는 앞으로 동물 보호에도 목소리를 내고 싶고, 나아가 봉사하는 삶을 꿈꾼다고 했다. “동물이 사람보다 나아요. 동물은 사랑밖에 없는데,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동물도, 사람도 다치게 하잖아요. 저는 감동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는데, 오드리 헵번이 유니세프 활동한 것처럼 언젠간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돌려줘야 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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