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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의 ESG 인사이트] 이타적이나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ESG 투자

중앙일보

입력

정확히 20년 전의 일이다. 2003년 5월 어느 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주주총회 현장에 있었다. 영국 런던 유학 시절 참석했던 영국 최대 제약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주총이었다. 그곳은 그 이전 내가 국내에서 경험했던 주총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우선 넓은 강당 안을 빼곡히 채운 주주들의 뜨거운 열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탐욕스러운 경영진을 상징하는 ‘살찐 고양이(Fat Cat)’ 마스코트를 들고 격렬히 외쳤다. “팻 캣, 장 피에르 가르니에 최고경영자(CEO) 퇴직금 안에 반대한다.”

결국 그날 상정됐던 가르니에의 퇴직금(2200만 파운드, 약 361억원) 안건은 부결됐다. 소수 주주 연대의 힘을 실감했다. 한국 기업의 주총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날 주총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자를 자처하는 한 주주의 발언 때문이었다. 당시 GSK는 세계 최대 에이즈 치료제인 ‘지도부딘’ 생산 업체였으나 고가 정책으로 지탄을 받고 있었다. 그 투자자는 말했다. “가르니에 CEO에게 지급될 그 돈(퇴직금)이면 아프리카에서 에이즈로 죽어가는 환자들 10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이 무슨 엉뚱한 주장인가? 회사 대표에게 지급될 거액의 퇴직금을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 형태로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환자들에게 돌려주라니? 그것은 저개발 국가를 지원하는 자선단체 활동가 혹은 인권 운동가가 주장할 법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이익’이 아닌 ‘인류애적 이익’을 주장하는 듯한 그 주주의 모습은 낯설면서 혼란스러웠다. ‘주주는 단기적 자기 이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 대표적인 이해 관계자’라는 오래고 굳은 내 개인적 믿음이 흔들렸다.

주주의 자기 이익 극대화를 둘러싼 우려는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주주 유한 책임(limited liability)’부여 문제를 놓고도 시끄러웠다. 즉 기업이 부채를 남기고 도산해도 주주는 출자한 만큼만 책임진다면 도덕적 해이가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유한 책임 법안 상정을 앞두고 어떤 의원은 이렇게도 비판했다. “유한 책임은 모든 거래에서 발생한 부채를 다 갚아야 한다는 상법의 기본적 의무조항을 파괴한다. 또한 주식 매입 시 손실은 한정적이나 기대이익을 무한정으로 하면 주주들의 이기적이며 무분별한 투기적 언동이 크게 퍼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대 속에서도 1856년 영국 의회는 유한 책임을 회사법에 포함시켰다. 미국도 19세기 후반, 주(洲)마다 그 도입 시기는 달랐지만 유한 책임을 명문화했다. 그래야 중산층을 주식 시장에 참여시킬 수 있고 기업의 자본 조달이 수월해지며, 결과적으로 노동자와 자본가를 한 배에 태움으로써 계급 갈등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서다.

그러면 국내 주주들의 모습은 어떨까. 지난달 상장사 주주총회를 보자. 올해는 유독 국내 행동주의 기관 투자가들의 주주 제안이 많았다. 안다자산운용과 FCP의 KT&G, 트러스톤자산운용의 BYC, 한국알콜, 태광산업, 차파트너스의 남양유업, 얼라인파트너스의 JB금융지주 등에 대한 제안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해당 안건 대다수는 배당금 상향, 자기 주식 취득 및 소각, 감사위원 선임, 액면 분할 등 주주 이익 제고와 관련한 전통적 주장이었다. 결과는 제안사들 입장에서 실망스러웠다. 분기 배당 신설, 감사위원 선임 등 총 7개 상장사 중 3개사에서만 일부 안이 가결됐을 뿐 나머지는 모두 부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ESG 투자 관점에서 마뜩잖았던 부분은 따로 있다. 국내 주주 제안 내용은 모두 주주만을 위한 이기적 주장들로만 가득 찼기 때문이다. 20년 전 런던 GSK 주총에서 목격했던 저개발국 환자들인 이해 관계자를 배려하는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국내 행동주의 투자가들의 항변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의 턱없이 기울어진 소수 주주 권리부터 먼저 바로 세우고 ESG는 그다음 단계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단기적 주주 권리 및 이익만을 전제로 한다. 다시 GSK로 가보자. 2000년 주총 이후에도 GSK는 아프리카에서의 고가 정책을 고수했다. 오히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에이즈 퇴치를 위한 복제의약품 구매에 대해선 특허 침해 소송으로 대응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여론은 특허 침해를 당한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지만 이 경우는 정반대였다. 국제사회는 환자 치료 대신 이윤 극대화만 따지는 GSK를 맹비난했다. 결국 GSK는 백기를 들었다. 가격 차별화 정책을 통해 저개발국에 보급하는 지도부딘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춘 것이다. 현재도 GSK는 에이즈 치료제의 환자 접근성을 최우선에 놓고 있다.

GSK의 가격 정책 선회는 단기적으로 해당 제품의 채산성 둔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미래 시장 선점을 위한 ‘선제 투자’로도 볼 수 있다. 글로벌 제약 시장의 평균 성장률은 5% 안팎이지만 아프리카를 위시한 저개발국은 15%를 웃돌아서다. 이들 국가의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GSK엔 이미 축적된 기업 이미지를 바탕으로 유리한 영업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GSK 주주에게도 비례적으로 돌아갈 몫이 커질 것이다.

대체로 의미 있는 일들을 할 때 그 비용 측정은 쉽지만 반대급부의 측정은 복잡하고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업은 측정의 용이성 측면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단기 이익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합리적 이성적 행동 양식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것은 당초 의도와 달리 반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말이다. 더욱이 소셜미디어(SNS) 시대에 기업 이미지, 명성, 브랜드 가치 등은 부가가치 창출의 핵심 요소다. ‘신뢰’가 곧 ‘제품’인 제약회사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대부분의 투자자가 성말라서 그렇지 인내심을 갖고 보면 이타적 비용 지출이 이기적 투자 과실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뇌 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뇌 건강과 힐링을 위해서는 옥시토신, 세로토닌, 멜라토신 3대 호르몬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세로토닌, 멜라토신 분비를 유도 촉진하는 옥시토신은 ‘나눔’과 ‘자애’, ‘베풂’이라는 이타적 행동과 생각을 할 때 뇌 속에서 분비된다고 한다. 즉 이타적 행동이 자신의 건강을 돕는 것이 된다.”

이렇듯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타’와 ‘이기’의 상호 긴밀성 원리는 기업에도 적용 가능하다. 기업의 이타적 행동은 가장 먼저 종업원의 자긍심을 높이고,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며, 더욱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잠재 고객과 지역사회에는 홍보 효과를 높이는 전략적 마케팅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결과 매출과 이익이 증대되면 배당 재원이 늘고, 주가 역시 상승할 수 있으니 결국 주주도 행복해 할 것이다. 다만 이 모든 선순환 사이클은 길게 볼 때 비로소 보인다.

이제 국내에서도 기업 이해 관계자와 한 배를 타는 투자자들이 등장하길 기대한다. 유한 책임이란 특권과 동시에 도덕적 해이의 당사자로 의심받기 쉬운 주주는 먼저 사회적 정당성과 폭넓은 지지를 얻을 때 그 발언권도 커진다. 그것은 곧 자기 이익 확대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소수 주주권 회복 이후 그다음 단계로 ESG 개선이라는 순방향의 프로세스가 막힌다면, ES 우선의 역순으로 문제를 풀어 보자. 불순한 주주 포퓰리즘 프레임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가치와 주주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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