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섬나라 키프로스(영어로는 사이프러스)는 바다, 또 바다였다. 경기도보다도 작은 섬(국토 면적 9251㎢)에 해수욕장만 160개에 달했다. 눈만 돌리면 파도를 타는 요트와 서퍼, 해변의 연인, 낭만적인 노래를 쏟아내는 칵테일 바가 나타났다. 일정 내내 해변을 낀 리조트에서 잠들었고, 지중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엄청난 호사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이 딱 그랬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가 탄생했다는 신비의 섬에 다녀왔다.
영국·러시아 등서 매년 400만명 찾아
유러피안에게 키프로스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휴양지로 통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 해 400만 명 이상이 방문했는데, 그중 절반이 영국·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관광객이었다. 관광 가이드 알렉시아 크리스토둘루는 “키프로스만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종식되길 바라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면이 바다인 곳에서 자란 동양인에게도 키프로스의 바다는 신기했다. 150개가 넘는 리조트와 호텔이 몰린 최대 휴양도시 ‘아이아 나파’에 ‘무산’이란 이름의 해저 조각공원이 있었다.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최대 수심 9m)에 나무와 사람 등을 표현한 조각품 93개가 설치돼 있다고 했다. 이 해저 숲을 탐험하는 다이버들을 물 밖에서 넋 놓고 구경했다. 한 전문 잠수부가 “2년 전 조성했는데, 벌써 전 세계에서 다이빙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 귀띔했다.
어느 날은 서부 바닷가에 버려진 거대한 난파선(에드로 3호)을 보며 일몰을 맞았다. 가이드 알렉시아가 “2011년 태풍 때 파손된 화물선인데, 지금은 지역 최고의 명물로 통한다”고 말했다. 녹슬고 기울어진 난파선 너머로 저물어 가는 태양을 보는 심경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서쪽 땅끝마을 ‘폰타나 아모로사’에서는 ‘블루 라군’으로 가는 유람선을 탔다. 오래전 영화에서 브룩 실즈가 누비던 열대의 무인도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맑고 푸른 바다 빛깔만은 영화 속 풍경 못지않았다. 연안에 배가 멈추자, 유람선 관광객들이 하나둘 물속으로 뛰어들어 블루 라군의 여유를 즐겼다.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키프로스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테다. 미(美)의 신 아프로디테와 그가 사랑한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 우상 숭배의 상징이 된 피그말리온의 고향이 바로 키프로스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키프로스에 있는 내내 신화의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일단 첫발을 뗀 공항의 이름부터 ‘Hermes Airport’이었다. 명품 브랜드가 아니라 전령의 신, 여행·상업의 신으로 유명한 ‘헤르메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서남부 해안 도시 파포스에는 아예 아프로디테의 탄생지도 있었다. ‘아프로디테 바위’라 불리는 ‘페트라 투 로미우(Petra tou Romiou)’다. 그림 같은 연안에 들어앉은 육중한 바위인데, 이 바위틈에 인 물거품 속에서 여신이 태어났단다.
“보름달 뜨는 맑은 밤 알몸으로 이 바위 주변을 헤엄치면 불멸의 아름다움은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알렉시아는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로 눙치기엔 너무도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이었다.
‘파포스 고고학 유적지(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의 대표 유적도 그리스 신화의 유산이었다. 이른바 ‘디오니소스 저택’에는 2~3세기에 만든 모자이크 바닥 장식만 500㎡(약 150평)이 넘었다. 바다의 신 넵튠과 아미모네의 비극적인 사랑, 독수리로 변해 어린 소년을 납치하는 제우스 등 그리스 신화의 명장면이 모자이크로 정교히 재현돼 있었다.
서부 아마카스 국립공원에선 아프로디테의 이름을 딴 트레일을 걸었다. 떡갈나무가 우거진 2㎞ 길이의 숲길인데, 그 오솔길 끝에 아프로디테가 몸을 담갔다는 작은 연못(Baths of Aphrodite)이 있었다.
키프로스 어디서나 고양이를 만날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에 딸린 전설도 있었다. 먼 옛날 섬에 득실거리는 뱀을 잡기 위해 하늘에서 고양이 두 마리를 선물로 내렸다는 것이다. 예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아서인지, 다들 애교와 붙임성이 대단했다. 참고로 키프로스 고양이 품종을 부르는 이름은 ‘아프로디테의 거인(Aphrodite’s Giant)’이다.
도면 없이 상상으로 만드는 레이스 공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과 키프로스의 1파운드 화폐(현재 유로 사용)에서 발견되는 공통점 하나. 아름다운 레이스 문양의 헝겊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키프로스 내륙의 산간마을 레프카라에서 내려오는 수공예 레이스 ‘레프카라티카(Lefkaratika)’다. 도면 없이 경험과 상상에 따라 바느질하는 것이 레프카라티카의 특징. 식탁보 하나를 만드는 데 적게는 석 달, 길게는 1년 이상 걸린다. 레프카라 고유의 여성 문화로 약 600년의 역사를 헤아리는데, 2009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도 올랐다.
마을에서 반세기를 버틴 레이스 판매점에 들렀다. 데모스 루비스 사장은 “1481년 키프로스를 방문한 다 빈치가 레프카라티카에 감명받아 밀라노 대성당에도 선물하고 ‘최후의 만찬’에도 그려 넣었다”고 말하며, 각종 레이스 공예품을 선보였다. 큼지막한 식탁보부터 컵 받침, 베갯잇 등 없는 게 없었다. 어머니 툴라 루비스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늙어가고 배우려는 사람은 적어서 큰일”이라고 했다. “열두 살부터 70년 넘게 레이스를 만들었다”는 그는 이날도 가게 앞까지 나와 앉아 바느질하며 손님을 맞고 있었다.
디오니소스가 바친 ‘코만다리아’ 와인
여러 종류의 지중해산 해산물을 맛봤지만, 혀끝에 가장 긴 여운을 남긴 건 ‘코만다리아’라는 이름의 와인이었다. 키프로스에서도 와인을 만든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와이너리가 여럿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도 길었다. 현지에서 얻은 가이드 북에는 “문헌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와인으로, 무려 4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적혀 있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아프로디테를 유혹하며 건넸다는 바로 그 와인이다.
와이너리의 한 직원은 “남부 트로이도스 산맥에 와이너리 14개가 모여 있는데, 이곳의 포도로 술을 만들고, 또 2년 이상 숙성해야 ‘코만다리아’라는 상표를 달 수 있다”고 말했다. 맛은 어떨까. 솔직히 소주파의 입에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풍부한 과일 향과 단맛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도 코만다리아를 한 병 손에 쥐고 와이너리를 빠져나왔다. 역사도 스토리텔링도 과장이 세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신화의 땅에서 신의 술을 마신다’는 기분 좋은 최면에 빠져 있었다.
☞여행정보=키프로스는 분단국가다. 1974년 분쟁 이래 그리스계 남부(키프로스)와 튀르키예계 북부(북키프로스)로 분리돼 오늘에 이른다. 전 세계에 문을 열고 있는 키프로스와 달리, 북키프로스는 튀르키예나 키프로스를 통해서만 입국할 수 있다. 키프로스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카타르항공을 이용하면 대략 15시간이 걸린다. 인천공항에서 도하까지는 10시간 20분, 다시 키프로스까지는 4시간 거리다. 화폐는 유로를 쓴다. 물가는 서울과 비슷한 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이 보통 3.5유로(약 5000원)다. 시간은 한국보다 6시간이 느리다. 코로나 관련 입국 규제가 사라져 추가 서류 없이도 입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