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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300만원이 ‘식대’일 뿐이라는 민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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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300만원을) 국민이 큰 금액이라고 생각하지만, 실무자들의 차비, 기름값, 식대 수준이다.”

2년 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의원들에 살포된 돈 봉투 금액에 대해 당의 실세인 정성호 의원이 방송에서 한 말이다. ‘1000원의 아침’에 대학생들이 장사진을 치고, 전세 사기로 생활고에 시달린 젊은이가 “엄마 2만원만 보내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뜬 마당에 ‘친명 좌장’ 의원님은 수백만 원대 뇌물성 돈 봉투를 ‘차비와 식대 수준’이라 선언했다. 고물가에 한 푼을 아끼려고 피눈물 흘리는 서민의 가슴을 갈가리 찢는 망언의 극치다. 그는 뒤늦게 ‘실언’이라고 사과했지만, 실언 아닌 진담이었으리라고 믿는 국민이 대부분일 것이다.

돈봉투 의혹, 궤변과 물타기 급급
‘기획수사’ 주장도 사실과는 거리
자칫 총선까지 의혹에 묶일 수도

민주당이 이번 사건을 대하는 기조는 예견된 시나리오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처음엔 ‘사실무근’이라고 했다가 돈 살포 정황이 적나라한 녹음 파일이 나오자 ‘소액’이라 물타기 하며 ‘검찰의 기획 수사’로 몰아가고 있다. 문제의 파일은 지난해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을 수사할 때 확보된 건데, 여권에 악재가 이어지는 요즘 검찰이 국면전환용으로 언론에 흘렸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검찰은 문재인 정부 때 ‘검언유착’ 파동으로 큰 홍역을 치렀다. 그래서 자료 유출에 극도로 민감하다. 문제의 파일은 검찰 수뇌부도 들어보지 못한 1급 보안 자료다. 해당 수사팀의 극소수만 들여다보고 있다. 검찰은 그 인원 전부를 조사했지만, 파일을 언론에 흘린 이는 없음이 드러났다고 한다. 또 파일이 사전에 보도되면 수사에도 좋을 게 없다. 당사자들이 입을 맞추고 증거를 인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검찰은 해당 매체에 “수사에 지장이 우려되니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민주당 주장대로 검찰이 파일을 쥐고 있다가 터뜨릴 시점을 쟀다면, 그 시점은 지금이 아니라 이재명 대표 체포 동의안을 국회에 보낸 2월 말이었어야 한다. 그때 돈 봉투 의혹이 함께 터졌으면 “자기들 체포동의안 막으려고 대표 체포동의안 부결시켜주나”는 여론의 맹공에 민주당 의원들이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기 극히 어려운 상황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일의 출처는 검찰이 아니라, 이정근 전 부총장 측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전 부총장은 파일을 확보한 검찰의 송곳 추궁에 손을 들고 수사에 협조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민주당이 ‘이 전 부총장 개인의 일탈’로 몰아가니, 이에 분노한 이 전 부총장 측이 “난 전달책일 뿐 몸통은 따로 있다”고 폭로하려고 파일을 흘렸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근거도 있다. 3만건에 달하는 녹음 파일을 이 전 부총장 측이 현재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 전 부총장의 휴대 전화를 압수한 뒤 내용물만 복사하고 돌려줬다. 영장에 적시된 압수 대상은 전화기에 든 정보지, 전화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 부원장 측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녹음 파일을 언론에 제공하는 게 가능한 상황이다.

검찰 소식통에 따르면 돈 봉투 살포 의혹은 이 전 부총장의 10억여원 금품 수수 혐의 수사를 위해 녹음 파일을 하나하나 듣는 과정에서 튀어나왔다. “관석이 형(윤관석 의원)이 ‘의원들 좀 줘야 하는 거 아냐’라고 얘기하더라” 같은, 상상도 하기 힘든 대화를 들은 수사진은 경악했다고 한다. 혐의자를 수사하다 다른 혐의가 추가로 드러나면 별도의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해야 하는 게 검찰의 의무다. 안 하면 직무 유기가 된다.

검찰이 녹음 파일 수사를 일찌감치 마쳐놨다가 최근 터뜨렸다는 민주당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파일 수사는 간단하지 않다. 한 시간짜리 파일 수사에 10배 넘는 시간이 걸린다. “봉투 10개를 준비했다” 같은 결정적인 발언은 한 시간 동안 대화 중 수초에 불과하다. 그 말을 잡아내려면 같은 파일을 여러 번 들어야 한다. 발언의 맥락과 의도까지 파악하려면 발언 전후 대화도 다시 여러 번 들어봐야 한다. 파일 필사에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린다. 녹음을 풀어 써주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정확도는 90% 정도다. 수사는 100% 완벽한 필사를 요구하므로, 속기사들을 써야 한다. 이런 이유로 검찰이 돈 봉투 의혹을 확실히 파악하고 수사에 나선 것은 극히 최근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끝이 아니다. 3만건의 파일 중 검찰이 푼 건 수천개뿐이라고 한다. 남은 파일을 푸는 과정에서 또 어떤 의혹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민주당이 궤변으로 시간을 끌며 물타기와 은폐에 급급하다면 1년 내내 녹음 파일 게이트 수사와 재판에 묶여 내년 총선에서 낭패를 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