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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 비용만 3000만~4000만원"…학폭 소송, 웃는자 따로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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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지윤]

[일러스트=김지윤]

“시간과 돈도 물론 아깝지만, 소송 하느라 정작 아이 마음을 충분히 돌보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되네요.”

자녀의 학교폭력(학폭) 피해로 2년 동안 소송에 매달려온 A씨의 말이다. 정순신 변호사의 국가수사본부장 낙마 이후 학폭에 대한 공분이 커지자 정부는 지난 12일 학교생활기록부의 중징계 처분 기록 보존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대학 입시에도 불이익을 주는 강경책을 내놨다. 피해자의 고통이 큰 만큼 가해자에게도 ‘정당한 낙인’을 찍어 경각심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교육 현장 일각에선 학폭 사건이 줄어들기보단, 관련 법 시장만 키워주는 ‘외주화 대책’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부모와 변호사들이 벌이는 다툼 속에 정작 아이는 소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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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학교 폭력 관련 법 시장은 활황을 맞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학폭위 결정에 반발해 행정심판 또는 행정소송을 제기한 건수가 1614건이었다. 2020년 767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의 심의 건수 역시 2021년 2만 1625건으로 2020년 8357건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학폭위에 다수 참여한 법무법인 정향 이승우 변호사는 “최근 학폭 사건 문의가 크게 늘었다”며 “이번 교육부 조치로 사건이 더 늘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 학폭 사건 경험이 많은 노윤호 변호사도 “요즘 학폭 과거가 나오면 사회생활이 어렵다 보니 인생이 끝장난다는 생각에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며 “수요가 생기니 중대형 로펌들도 학폭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추세”라고 말했다. 구글에 ‘학폭 변호사’를 검색하면 변호사 수가 20명이 넘는 대형 로펌들의 광고가 넘쳐난다.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이 강화되면서 '학교폭력전담'을 내건 변호사 시장도 점차 커지고 있다. [중앙포토]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이 강화되면서 '학교폭력전담'을 내건 변호사 시장도 점차 커지고 있다. [중앙포토]

“지나고 보니 아이는 소송에 더 상처…소송이 답 아니다”

그러나 학폭 소송을 겪은 학부모나 전문가들은 ‘소송이 답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행정심판과 행정소송, 민·형사 소송으로 2년을 보낸 A씨도 마찬가지다. A씨 자녀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2년 전 동급생에게 학교 폭력을 당했다. 상대는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A씨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전에 돌입했다. 비용도, 시간도 만만치 않게 썼다. 하지만 얻은 건 별로 없었다. 가해 학생은 학폭위에서 1·5호 처분(반성문과 교육 이수)을 받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처벌이 약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자녀가 소송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는 점이었다. 학교 폭력 사건보다 아이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벌인 자신의 소송 때문에 아이가 더 힘들어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A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가 원한 건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주는 정도였는데, 내 멋대로 가해자 처벌만 생각하며 사건을 길게 끌고 갔다”며 “결국 친구들 사이에도 사건이 다 알려지자 아이는 등교 거부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변호사비만 1100만원…“법 시장만 키우고 아이는 소외” 비판도

최근 중학교 2학년 자녀가 학폭 사건에 휘말린 C씨 역시 “상대방 부모가 모든 대화를 거부한 채 ‘무조건 소송’으로 끌고 갔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학교에선 C씨에게 ‘친구끼리 다투다 생긴 쌍방 폭행’이라고 설명했지만, 상대 부모는 일방적인 학교 폭력 피해를 당했다며 신고했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사건이 법정까지 가자 C씨도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행정심판에 500만원, 형사 소송에 600~700만원을 더해 1000만원 이상이 든다고 했다. C씨는 “적극적인 화해 주선에 나서지 않고 혹시 책임이 생길까 뒷짐만 지는 학교 대응이 실망스러웠다”며 “학폭위로 넘어가는 순간 아이들의 화해와 반성 같은 건 사라지고 하나의 사건으로 다뤄질 뿐이다. 억울하면 큰돈을 주고 변호사를 구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부총리-시도교육감협의회 임원단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 12일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보존 기간을 4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부총리-시도교육감협의회 임원단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 12일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보존 기간을 4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도 “교육부가 ‘교육’ 역할을 포기한 건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푸른나무재단 김석민 상담사는 “학폭 사건이 부모들 간 싸움 되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들이 아이 말을 듣기보다는 ‘얘는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으로 본인의 목표인 승소와 가해자 처벌에 몰두하다 오히려 아이가 정서적으로나 학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 지역을 관할하는 한 학교전담경찰관도 “민사 소송까지 가면 변호사비만 3000~4000만원을 쓰는 일도 많다. 일부 변호사들이 싸움을 부추기기도 하고 학부모들도 ‘법대로 하자’는 인식이 강한데,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고 싸움이 길어지며 고통만 커진다”고 지적했다.

변호사들 역시 학폭 사건은 교육에 초점을 두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청소년 사건 경험이 많은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는 “교육부 대책은 학폭을 외부인에 떠맡기는 ‘외주화 조치’이자, 아이들을 ‘제2의 가정’인 학교에서 밀어낸다는 점에서 잘못”이라며 “가해자가 ‘더 글로리’ 주인공처럼 악독한 경우도 있지만 일상의 작은 다툼인 경우가 더 많다. 학폭 가해자도 아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학교에 대한 신뢰까지 무너지면 불안한 학부모가 몰리는 법률 시장만 승자가 되고, 아이들은 오히려 소외된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선율로 남성진 변호사 역시 “이번 대책 이후 학폭 관련 수임이 늘어날 거로 보인다”면서도 “학폭 예방은 선도 및 교화목적이 우선적이라는 점이 간과된 조치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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