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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4·19혁명이 남긴 과제 두 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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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청수 4·19혁명 당시 서울대 문리대 대의회 의장

이청수 4·19혁명 당시 서울대 문리대 대의회 의장

63년 전 1960년의 4·19혁명은 추상적 대의명분에서 출발해 끝내 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 관철했다. 4월 19일 첫날 오전 선도 대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갈 때는 ‘자유·민주·정의를 달라’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이 주요 슬로건이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위의 정당성 확보 차원이었다.

그러나 그날 낮부터 전국 학생들의 총궐기로 발전하고 시민들이 노도처럼 호응하면서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체적 구호를 외쳤다. 서울 광화문에 집결한 시위대가 ‘경무대(청와대)로 가자’면서 해일처럼 밀려갔다. 이때 경무대 입구에서 경찰의 총격이 시작됐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 피를 본 시위대는 ‘대통령 물러가라’며 극한으로 치달았다. 그 1주일 뒤인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며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났다.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 다져
끊임없는 개혁 계기 삼아야
이승만 재평가, 역사 화해 필요

4·19 혁명 기록물 자료. [사진 문화재청]

4·19 혁명 기록물 자료. [사진 문화재청]

1주일 만에 성공한 혁명은 세계사적으로 봐도 이례적이다. 1688년 영국 명예혁명은 1년, 1776년 미국독립혁명은 7년, 1789년 프랑스대혁명은 3년 반, 1917년 러시아혁명은 8개월이 각각 걸렸다. 대한민국은 4·19혁명 성공 이후 5·16, 10·26, 5·18, 6·10, 6·29 등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끝내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가 30여년 지연되는 값비싼 대가로 산업화가 먼저 달성됐다.

4·19혁명 당시 ‘민주주의(자유)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학생들의 행동 철학이었다. 미국 독립 혁명 과정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했던 말인데 4·19혁명 직전 장준하가 ‘사상계’의 권두언 첫머리에 출처 없이 소개했다. 그 시절 평화주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혁명은 래셔날리즘(냉철한 이성적 논리)과 로맨티시즘(낭만적 감성의 용기)이 결합할 때 성공한다”고 갈파했다. 4·19혁명이 성공하는 원동력이 됐다.

김대중은 1980년 4·19혁명 20주년 기념 강연에서 제퍼슨의 말을 새로 외쳤고 한 달 뒤의 5·18을 촉발했다.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내란선동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피를 바칠 뻔했다. 김영삼은 호랑이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고 1992년 선거로 군정시대를 종식했다. 김대중은 이를 발판으로 피가 아니라 말로 하는 선거에서 정권교체를 이뤘다.

하지만 아직도 피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하는 듯한 정치 행태가 가끔 나타나고 있다. 이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나무는 (무서운) 피가 아니라 (좋은) 말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실증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무엇보다 다시는 피를 흘릴 필요가 없도록 우리가 모두 끊임없는 개혁과 혁신을 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4·19혁명 63주년을 맞는 첫째 과제다.

둘째 과제는 4·19혁명의 대상이었던 이승만 재평가와 역사적 화해 문제다. 최근 4·19혁명 세대 주역 중에 일부가 국립서울현충원의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역사적 화해의 모습을 보인 것은 큰 변화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란 올바른 역사적 선택을 했다. 우리가 최빈국 수준에서 오늘날 세계 10위 권의 자유민주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이승만 재평가는 재론이 필요 없다. 4·19혁명 당시 독재에 항거하던 186명의 피를 보고서야 물러난 것이 가장 큰 과다.

그래도 대부분의 독재자처럼 무작정 버티기로 일관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유혈 진압을 단념하고 1주일 만에 하야를 결단했다. ‘국민의 뜻’에 따르는 민주 정치의 철칙을 뒤늦게나마 지켰다. 그래도 화해하기 어렵다는 여론이 아직 있는 것 같다. 독재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된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는 꼭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앞으로 평화적 남북통일이 실현될 경우 북한은 두말할 필요 없이 김일성을 국부로 세우자고 우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우리 대한민국은 이대로 가면 국부로 내세울 사람이 없게 된다. 김일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가 훨씬 적은 건국 대통령이 있는데도 말이다. 4·19혁명 정신이 박물관의 화석처럼 박제돼 있지 않고 영원히 살아 숨 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두 과제를 반드시 승화·발전시켜 가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청수 4·19혁명 당시 서울대 문리대 대의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