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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던지기’ 금메달 딴 그녀, 인천서 인생 2막 준비 중이었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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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렇게 아파했을 줄은….”

18일 인천 인하대병원 장례식장.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중년 남성이 울먹였다. 지난 17일 인천 미추홀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딸 박모(31)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면서였다. 지난 1월 딸 박씨는 설 연휴를 맞아 부산 아버지 집을 찾았다. 딸은 근황을 묻는 아버지에게 “집 때문에 고민했는데 잘 해결되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건축왕’으로 불린 남모(61)씨에게 전세사기를 당한 박씨는 석 달 뒤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 박씨의 아버지는 “집 문제가 잘 해결된 줄 알았다. 전세사기로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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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전직 체육인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강원도에서 원반던지기 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부산의 고모 집으로 이사했다. 생계를 위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던 박씨를 돌려세운 건 부산체육고등학교 성희복 감독(현 부산 동항중 교감)이었다. 성 감독은 박씨에게 “숙식은 물론 용돈도 주겠다”며 해머던지기를 해보자고 제안했고 박씨는 다시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성 감독은 “대회에 15번 출전해 모두 금메달을 딸 정도로 탁월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2009년 부산체고 소속으로 전국체전 여고부 해머던지기 부문에 출전해 51m50로 대회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전국 곳곳을 오갔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해 말 운동을 그만둔 박씨는 애견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학원에 다녔고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3월 29일 법원으로부터 집이 임의경매에 넘겨진다는 통보를 받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박씨는 전세사기 피해자가 돼 있었다. 박씨는 보증금 9000만원으로 재계약하면서 경매 낙찰 후 최우선변제금(보증금 8000만원 이하에만 해당) 2700만원도 보장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박씨는 미추홀구전세사기대책위원회에 들어가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 7일 새벽엔 전세사기 피해자가 모인 단체채팅방에 “늦은 시간 퇴근하고 저도 인증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집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스티커를 각자 집 앞에 붙였는데 여기에 동참한 것이다. 이날 박씨의 이웃은 “늘 밝은 모습이던 박씨가 떠난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한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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