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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던지기 여고부 챔피언도…'건축왕' 전세사기에 무너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7일 사망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31)씨의 빈소가 18일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심석용 기자

지난 17일 사망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31)씨의 빈소가 18일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심석용 기자

“그렇게 아파했을 줄은….”
18일 인천 인하대병원 장례식장.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중년 남성이 울먹였다. 지난 17일 인천 미추홀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딸 박모(31)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면서였다. 지난 1월 딸 박씨는 설 연휴를 맞아 부산 아버지 자택을 찾았다. 딸은 근황을 묻는 아버지에게 “집 때문에 고민했는데 잘 해결되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그러나 현실은 대답과 달랐다. 이른바 ‘건축왕’으로 불린 남모(61)씨에게 전세 사기를 당한 박씨는 석달 뒤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 박씨의 아버지는 “딸이 하도 안심을 시켜서 집 문제가 잘 해결된 줄 알았다. 전세사기로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며 고개를 숙였다.

박씨는 전직 체육인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강원도에서 원반던지기 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부산의 고모 집으로 이사했다. 생계를 위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던 박씨를 되돌려 세운 건 부산체육고등학교 성희복 감독(현 부산 동항중 교감)이었다. 성 감독은 박씨를 찾아가 “숙식은 물론 용돈도 주겠다”며 해머던지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기나긴 설득에 박씨는 다시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지난 17일 사망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31)씨의 빈소가 18일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사진 유족

지난 17일 사망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31)씨의 빈소가 18일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사진 유족

우연한 시작이었지만 운동 감각은 특출났다고 한다. 성 감독은 “훈련이 힘들었는데 성실하게 이겨냈고 대회에 15번 출전해 모두 금메달을 딸 정도로 탁월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지난 2009년 부산체고 소속으로 전국체전 여고부 해머던지기 부문에 출전해 51m 50로 대회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당시 금메달을 따고도 “목표(55m) 이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등 강한 승부욕을 보였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전국 곳곳을 오갔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해 말 인천에서 운동을 그만뒀다. 박씨는 운동을 접으면서도 인생 2막에 대한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애견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학원에 다녔고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3월 29일 비보가 전해졌다. 법원으로부터 집이 임의경매에 넘겨진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박씨는 전세사기의 피해자가 돼 있었다. 집이 경매에서 낙찰돼도 박씨가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은 없었다. 2017년 7월 근저당권이 설정된 박씨의 집은 전세보증금이 8000만원 이하일 경우에만 최우선변제금 2700만원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재계약 당시 전세보증금을 9000만원으로 올린 박씨는 구제대상에서 제외됐다.

사망 열흘 전인 지난 7일 새벽 박씨는 미추홀구전세사기 피해자가 모인 단체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고 한다. “늦은 시간 퇴근하고 저도 인증합니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집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스티커를 각자 집 앞에 붙이고 있었는데 박씨가 동참하겠단 뜻을 밝힌 것이다. 사진 김병렬씨

사망 열흘 전인 지난 7일 새벽 박씨는 미추홀구전세사기 피해자가 모인 단체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고 한다. “늦은 시간 퇴근하고 저도 인증합니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집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스티커를 각자 집 앞에 붙이고 있었는데 박씨가 동참하겠단 뜻을 밝힌 것이다. 사진 김병렬씨

박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추홀구전세사기대책위원회(대책위)에 들어가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 7일 새벽엔 전세사기 피해자가 모인 단체 채팅방에 “늦은 시간 퇴근하고 저도 인증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집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스티커를 각자 집 앞에 붙였는데 여기에 동참한 것이다. 그랬던 박씨였지만 결국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17일 박씨의 자택 앞엔 '수도요금이 체납됐다'는 인천시상수도사업본부의 통지문이 붙어있었다. 이날 박씨의 이웃은 “늘 밝은 모습이었던 박씨가 떠난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한다”고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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