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읽는 삼국지](27) 배신자의 전형 여포, 그를 위한 변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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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둘째 권 읽기가 끝났습니다. 2권 책씻이로는 여포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람 중엔 여포요, 말 중엔 적토마’라는 말처럼 여포는 천하무적의 무용(武勇)을 자랑하는 장수입니다. 그런데 연의에서는 ‘배신자’와 ‘패륜아’의 전형으로 그려졌습니다. 물론, 역사에 기록된 여포의 행적을 바탕삼아 연의에서의 여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연의가 오랜 시대를 거치며 각색된 것처럼 여포의 형상도 시대마다 변했습니다. 연의의 전 단계 버전인 『삼국지평화』(‘평화’로 약칭합니다)에 그려진 여포의 형상과 비교해보면 여포가 아주 나쁜 배신자이자 패륜아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천하제일의 무력(武力)을 지닌 여포. [출처=예슝(葉雄) 화백]

천하제일의 무력(武力)을 지닌 여포. [출처=예슝(葉雄) 화백]

연의에서 여포와 동탁이 만나는 부분을 보면, 여포가 동향(同鄕)인 이숙의 꼬드김에 양부인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에게 의탁합니다. 그런데 평화에서는 동탁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량(西涼)으로 가는 도중에 여포를 만납니다.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사나운 호랑이처럼 나타난 군사들을 쓸어버리자, 죽은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도 없었다. 바로 군사를 점차 더하고 장수를 더 보태어서야 그를 잡을 수 있었다. 태사가 누구냐고 소리쳐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모두들 고함치기를, 

이 사내는 정원의 노비였습니다. 정원을 죽인 다음 그의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나려다가 군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태사는 많은 병졸과 장수들을 동원해 그를 포박하고 태사부로 들여왔다.

여포의 첫 등장은 이미 정원을 죽이고 달아나던 때였습니다. 여포의 신분도 정원의 수하 부장이 아닌 가노(家奴)입니다. 정원과 여포의 관계가 연의와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포가 정원을 죽이고 배신하게 된 이유도 연의와는 딴판입니다.

바야흐로 심문하려는데 정원의 집안사람이 말했다.

이 자는 다른 일이 아니라 말 때문에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여포가 말하기를,

나는 말 때문에 주공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주공은 자주 저를 모욕했습니다. 이 때문에 정원을 죽인 것입니다.

여포는 정원의 괴롭힘과 수모를 참고 견디다가 한계에 이르자 정원을 살해한 것입니다. 노비 신분이었으니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와 모욕을 당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여포는 나관중과 모종강이 연의로 재창작하는 과정에서 정원을 그의 양부(養父)로 만들고, 또 그를 죽이는 배신자이자 패륜아로 만든 것입니다.

여포와 초선의 관계 설정도 전혀 다릅니다. 연의에서의 초선은 사도 왕윤의 가기(歌妓)이지만, 평화에서의 초선은 여포의 부인입니다.

왕윤은 그녀를 정원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물었다.

너는 왜 향을 태우느냐? 사실대로 말하라.

초선은 깜짝 놀라 급히 무릎을 꿇고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사실대로 말했다.

저는 본래 임씨로 어릴 때 이름은 초선입니다. 남편은 여포인데 임조부에서 서로 헤어진 후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고 있어서 향을 태웠습니다.

왕윤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한나라의 천하를 편안케 할 자가 바로 이 여인이구나. 내 너를 친딸과 같이 대해주마.

곧 초선에게 금은보화를 주니 초선이 감사하고 돌아갔다.

왕윤은 여포와 초선이 부부라는 것을 알고 같이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초선을 동탁에게 보내놓고 이를 여포가 알게 합니다. 남편인 여포가 동탁을 죽이게 만든 것이지요.

갑자기 초선의 옷이 흐트러진 채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여포는 크게 화를 냈다.

역적은 어디 있느냐?

벌써 술에 취했어요.

여포가 칼을 뽑아 들고 안채로 들어가니 동탁이 천둥 치듯 코를 골며 고깃덩어리가 산을 이룬 듯 누워 있었다.

늙은 도둑놈이 무도하구나!

욕설을 내뱉은 여포는 한칼에 동탁의 목을 베어버리니 목에서 선혈이 용솟음쳤다. 몸을 찌르니 동탁이 죽었다.

여포는 천만다행으로 아내 초선과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할 때, 동탁이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탐한 파렴치한을 처단하는 것은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자를 응징하는 정당방위입니다. 왕윤이 동탁을 살해하기 위해 꾸며낸 계략을 몰랐을 뿐이지요.

섬서성 미지(米脂)에 있는 초선상. 여포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이다. [사진제공 허우범]

섬서성 미지(米脂)에 있는 초선상. 여포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이다. [사진제공 허우범]

하지만 연의에서의 여포는 파렴치한 동탁을 처단한 초선의 남편이 아닙니다. 초선의 미색에 빠져 양부인 동탁을 죽인 배신자이자 패륜아로 바뀌었습니다. 아내와 가정을 되찾기 위해 칼을 빼 든 여포가 되레 죽일 놈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여포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분통 터질 노릇입니다.

적어도 평화에서의 여포는 극단적 상황에 내몰려 살인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때 여포에게 배신자라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유비, 조조, 손권 등도 수시로 배신을 일삼는 난세였기 때문입니다. 반인륜적인 패륜아라는 말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정원이 양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탁은 양부였지만 양아들의 부인을 탐했습니다. 오히려 동탁이 반인륜적인 짓을 저지른 것이지요.

이러함에도 연의에서의 여포의 인물 형상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배신자’이자 ‘패륜아’의 전형으로 그려졌습니다. 나관중은 왜 여포를 이토록 나쁜 인간으로 바꿔놓았을까요. 그것은 여포의 출신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포의 고향은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입니다. 오늘날에도 내몽골 바오터우(包頭)입니다. 나관중은 명(明)나라 때 사람입니다.

여포의 고향 바오터우에 있는 여포상. [사진제공 허우범]

여포의 고향 바오터우에 있는 여포상. [사진제공 허우범]

명은 몽골이 만든 원(元)을 멸망시키고 건국했습니다. 원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닌 오랑캐가 세운 나라입니다. 원나라의 통치 기간에 한족이 오랑캐에 당한 수모와 치욕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나관중은 이러한 수모와 치욕을 연의에서 여포라는 인물을 통해 갚아준 것입니다. 연의는 이런 방식으로 역사에서 당한 치욕을 맘껏 갚았습니다. 삼국연의가 칠실삼허(七實三虛)라고 하지만 속속들이 파헤치면 삼실(三實)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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