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강남 10대 낚는 마법의 이 단어…마약범도 쓴 '악마의 유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티역 인근 도로에 마약 음료 주의 문구와 마약 신고 번호가 담긴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뉴스1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티역 인근 도로에 마약 음료 주의 문구와 마약 신고 번호가 담긴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뉴스1

“ADHD 치료제는 비타민 같은 거 아닌가요. 주변에 누가 먹는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계속 들어왔거든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한 남학생(19)의 말이다. 지난 14일 오후 10시 30분쯤 기자와 만난 그는 “성적을 높여주는 약이 있다면 어떤 약이든 다 먹겠다는 이야기를 최근 친구들과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에서 만난 일부 수험생들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법적 관리 대상인 향정신성의약품인데도 익숙해 보였다. 학생들에겐 ADHD 치료제가 아니라 ‘집중력 높이는 약’으로 통하고 있었다.

ADHD 치료제가 공부 잘하는 약?…올해만 40건 적발

이른바 '강남 마약' 사건의 '메가 ADHD' 상표의 음료. 사진 서울 강남경찰서

이른바 '강남 마약' 사건의 '메가 ADHD' 상표의 음료. 사진 서울 강남경찰서

최근 전국의 학부모들을 마약 공포에 빠트린 강남 학원가의 마약 음료 사건에서도 ADHD가 등장했다. 범인들이 마약을 탄 음료병에 그 병명이 쓰여 있었다. 이른바 ‘공부 잘하는 약’이라고 학원가의 학생들을 속여 마약을 먹인 것이다. 마약을 먹은 학생의 부모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보이스피싱과 결합된 마약 사건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서울 학원가의 ADHD 치료제의 오·남용 실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당시 살포된 마약 음료에는 ‘기억력 상승’ ‘집중력 강화’ ‘메가 ADHD’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10대 학생을 유혹하는 데 효과적인 용어들을 미끼로 쓴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학업 향상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학생들의 심리가 마약 관련 범죄에 이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향정신성의약품인 ADHD 치료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의사 처방 없이 사고파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 된다. 그런데도 온라인에서는 ‘기억력 개선’ 등을 내세운 ADHD 치료제 불법 광고 행위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16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메틸페니데이트·암페타민 등 각성제 성분이 포함된 ADHD 치료제를 온라인상에서 불법적으로 판매·광고한 행위는 올해에만 40건(1~3월)이 적발됐다. 지난해에는 259건이었다. 한 판매자는 회원 수 10만 명이 넘는 한 수험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언론에도 몇 번 나온 소위 공부 잘하는 약을 판다”는 글을 올렸다. ‘페니드’ ‘에더럴’처럼 상세한 약명도 언급됐는데, “공부 잘하는 약”이라는 설명과 함께 또 다른 마약류를 안내한 글도 적지 않았다.

식약처 관계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다가올수록 관련 광고가 급증하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평소에도 꾸준히 광고 글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식약처 관계자는 “수험생의 절실함과 불안 심리를 이용한 악질적인 범죄”라고 설명했다.

“진단 없이 먹으면 중독이나 뇌 손상 우려”

지난 3월 종영한 tvN '일타스캔들'에는 ADHD치료제를 집중력 높이는 약으로 먹고 학원 수업 중 쓰러진 여학생이 등장한다. 사진 tvN 유튜브 캡처

지난 3월 종영한 tvN '일타스캔들'에는 ADHD치료제를 집중력 높이는 약으로 먹고 학원 수업 중 쓰러진 여학생이 등장한다. 사진 tvN 유튜브 캡처

서울 대치동에서 만난 일부 학생들은 ADHD 치료제에 대해 “‘악마의 음료(고카페인 음료를 뜻하는 말)’처럼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이라면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재수생 여학생은 “효과가 있다고 하면 빠르게 소문이 나는데 ADHD 치료제는 꽤 오래전부터 알려진 약”이라고 말했다.

통계상으로도 서울 강남 일대에 ADHD 치료제 처방이 몰린다는 점은 학원가 학생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2021년 최근 5년간 ADHD 치료제 처방은 서울 내 강남 3구(강남·송파·서초)와 노원구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송파구(8.8%)에 이어 강남구(8.7%), 노원구(6.4%), 서초구(6.0%) 순이었다. 30% 정도 되는 ADHD 치료제 처방이 서울 25개 구 가운데 강남 3구를 포함한 이 4곳에서 이뤄진 셈이다. 신현영 의원은 “과거 교육열이 높은 강남 3구를 중심으로 ADHD 약물이 집중력을 높여준다며 공부 잘하는 약으로 둔갑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ADHD 치료제인 메틸페니데이트를 처방받은 10대는 2018년 3만2058명에서 2022년 4만1572명으로 30%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ADHD 치료제 관련 주의사항. "의사 처방 없이 자가복용 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식약처

ADHD 치료제 관련 주의사항. "의사 처방 없이 자가복용 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식약처

식약처는 17일부터 전국의 학교와 학원가 200곳 이상을 돌며 집중력·기억력 향상을 빙자한 의약품·건강기능식품 광고나 제공행위 등에 대한 집중 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수험생’ ‘다이어트 약’ 등 온라인상의 주요 단어도 모니터링 한다. 식약처 관계자는 “집중력이 좋아지는 약은 없다”며 “불법·부당 광고에 대한 단속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메틸페니데이트와 같은 ADHD 치료제는 뇌 신경을 자극하는 각성제로, 복용자 11% 정도가 중독으로 진행된다는 연구가 있는 만큼 잠재적인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많은 용량을 장기간 복용했을 때 뇌에 뚜렷한 손상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있어 ADHD 진단을 받지 않았다면 신중하게 투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