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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의 인간, 인쇄의 의미를 만끽하게 해 준 직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23년 4월 13일, 연이은 시위와 파업으로 늦춰지는 파리의 봄, 게다가 날씨도 쌀쌀해서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까지 한 사람들을 스치면서도 내 발걸음이 가벼웠던 건 특별한 전시회를 보러 국립도서관(BnF)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 그것도 평생 한 번 접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책들의 전시회니까.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직지. 12일(현지시간)부터 3개월 간 열리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에서 전시된다. 50년 만의 일반 공개다. 사진 이선주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직지. 12일(현지시간)부터 3개월 간 열리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에서 전시된다. 50년 만의 일반 공개다. 사진 이선주

"'1450년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라고 너도나도 학창시절에 배웠다. 하지만 이 표현에는 여러 가지 뉘앙스가 보태진다. 왜냐하면 아시아(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7세기 때부터 벌써 인쇄술이 나타났고 (…)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직지(1377년 한국)이고, 유럽의 첫 금속활자 책은 구텐베르크의 성서(1455년 독일)다."

 전시회 설명의 한 구절이다. 한국의 자랑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이 50년 만에 대중에게 소개되고 있다. 파리의 대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내가 또 한 번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감상을 안고 도서관에 도착했다. 전시회가 시작된 지 이틀밖에 안 됐고, 개관시간에 맞춰 서둘렀던 터라 한가한 전시관. 사실은 그게 목적이었다. 헐렁한 공간에서 직지를 나 혼자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지난 11일(현지시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IMPRIMER! L'EUROPE DE GUTENBERG)' 사전 공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된 직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지난 11일(현지시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IMPRIMER! L'EUROPE DE GUTENBERG)' 사전 공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된 직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11일 베르니사주(vernissage·전시회 첫날 특별 초대)가 한국 관계자들 덕분에 성황리에 이루어졌습니다. 10여 개의 한국 언론이 제각기 서너 명씩 왔더군요. 네, 직지가 한국의 자부심이라는 거 저도 잘 알아요. 저를 포함한 BnF 관계자들에게도 자부심이죠."
BnF의 이번 전시 언론 담당인 피오나(Fiona)는 공개 첫날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옆에 있던 도서관 경비 알리는 "12년간 여기서 일하며 그처럼 대단한 카메라 장비들은 딱 두 번 마주쳤는데, ‘아스테릭스 전시회’ 때와 이번 한국 기자들에게서였다"고 했다.

직지의 한국행 가능성에 대해 피오나는 다음과 같은 원론적인 답을 했다.
 "직지의 한국행은 아직 계획이 없지만, 한국 측과 협찬과 협조는 이미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직지의 디지털화 작업으로 직지가 굳이 한국까지 가지 않아도 조만간 한국에서도 만나게 될 거예요. 오늘 저녁에는 한국문화원에서 관련한 특별 강연회도 있고요."

 활발한 협조를 증명이라도 하듯 문화원의 직지 특별 강연은 예약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자리가 모두 차버렸다고 한다. 전시관 이곳저곳에서 디지털 화면들이 오래전 인쇄기술을 설명하고 있었다. 직지 역시 7분짜리 영상에서 한국 학자들이 한국어로 소개하고 있어, 나는 영상을 보지 않고 한국어 설명을 들으며 모든 시선을 직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1377년 만들어져 환갑을 열 번이나 넘긴 나이의 직지는 그 옛날의 한국처럼, 아담한 크기에 그리 두텁지 않은 소박한 모양새로 유리관 속에 놓여 있었다.

반세기 만에 일반 공개된 직지를 지난 11일(현지시간) 관람하는 사람들. 사진 문화재청

반세기 만에 일반 공개된 직지를 지난 11일(현지시간) 관람하는 사람들. 사진 문화재청

 인쇄 활자와 디지털화. 두 단어의 묘한 대립을 두고 상념에 빠져 있던 중에 한 무리의 소방관들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파업 중에 전시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이 구역 소방대 소속인데, 이곳에 책들이 많다 보니 이렇게 가끔 소방점검을 합니다."
 늘 책을 대할 수 있으니 남달리 유식하겠다고 농담하자 "다른 소방대원보다 우리가 특별히 유식하지는 않겠지만 지하층부터 가득 차 있는 이곳의 고서들을 접하노라면 감회가 항상 새롭습니다"라고 소방대원 중 하나가 답했다.

 '화씨 451도'는 종이가 불타는 온도이자, 미국의 SF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1953년 소설 제목이다. 완전통제의 미래 사회에서 소방관의 임무는 꼭꼭 숨겨진 책들을 찾아서 불태우는 것이라는 끔찍한 사회상이 소개된다. 왜? 책을 더는 출간하지 않는 미래 디지털 세상의 적(敵)은 진실을 담고 있는 고서(古書)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그런 세상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21세기 인터넷 디지털 시대, 14세기의 직지가 보여주는 인쇄의 세상은 ‘인간이 지구에서 언제나 말썽만 일으킨 건 아니다’는 확신이다. 인쇄의 등장 이후 역사는 누구나 저렴하게 책을 살 수 있는 정보의 대중화와 민주화이면서, 정보의 자유와 검열의 역사이기도 했다. 50년 만에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직지가 다음번에 전시될 때는 어떤 세상이 되어있을까. 세계적으로 챗GPT 열광이 한창인 때에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이선주=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번역 일을 한다. 『유럽의 나르시시스트 프랑스』을 썼고, 『몽테크리스토성의 뒤마』 『가자에 띄운 편지』 『연금술이란 무엇인가』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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