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물가’보다 ‘경기 침체’가 키워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로 다가왔다. 특히 우리나라가 그렇다. 반도체 경기 급랭과 대중(對中) 수출 감소의 역풍 탓이 크다. 무역수지 적자가 13개월째 이어져 외환위기 이후 25년 만의 최악으로 치닫고, 올해 1분기 무역수지 적자가 지난해 연간 적자 규모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실물경기 위축의 심각성을 보여 준다. 경제위기 전주곡으로 읽히는 경상수지 적자도 11년 만에 처음으로 두 달 연속 이어지고 있다.
이번 주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은행(WB)·국제통화기금(IMF) 춘계회의 화두는 악화일로의 단기 성장과 중장기적 경기 둔화 전망이다. IMF는 한국의 올해 성장 전망치를 4회 연속 삭감한 1.5%로 내렸고, 향후 5년간의 세계 성장 예측을 연평균 3%로 과거 30년 평균 대비 근 1%포인트 낮춰 잡았다. 미국 은행파산 사태가 금융시스템 리스크를 키우면서 경착륙 가능성까지 경고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3.5%로 두 번째로 동결해 통화정책 초점이 경기 침체와 금융 불안 대응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부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올해 한국 성장률이 1%대도 어렵다는 비관론과 함께 최근 원화 약세는 경제 체력 약화를 반영한다고 본다.
선·후진국병, 일본·아르헨티나병
합병증세로 잠재성장률 추락
근본치유 없이는 국가 미래도 없어
감동과 희망 주는 정치리더십 절실
이런 와중에 세계은행은 다가올 ‘잃어버릴 10년’ 경고음을 높이고 있다. 과거 30년은 세계화 물결 속에 자유무역과 국가 간 투자 확대 등으로 고성장·저금리의 유례없는 호황 시기였던 반면에 다가오는 10년은 투자 증가율 감퇴, 고령화와 노동생산성 약화 그리고 국제무역 증가세 둔화로 생산성 증가율은 떨어질 전망이다. 세계 잠재성장률 예측은 2000년대 초반 3.5%, 2011~2021년 2.6%에서 향후 10년은 30년 이래 최저 수준인 연 2.2%로 낮췄다. 세계 평균 성장을 밑도는 한국 경제에 던지는 메시지가 심상치 않다.
2017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연 이후 6년째 3만 달러 초반을 헤매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자칫 닥쳐 올 장기 침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른바 ‘3만 달러의 덫’을 피하기 어렵다. 국민소득 3만 달러에서 4만 달러 고지로 역대 가장 빨리 1년 만에 올라선 아일랜드를 포함해 일본, 캐나다, 네덜란드 등은 3년 이내에 점프했으나 남유럽 3국(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은 아직도 3만 달러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실패국들의 공통점은 노동시장 경직성과 낮은 생산성, 높은 국가 부채비율, 불안한 정치사회 환경 등이다.
전형적인 실패 사례로 꼽히는 이탈리아의 경험은 시사점이 적지 않다. 2005년에 3만 달러를 돌파했으나 지난해 3만5000달러 선에 머물며 18년째 답보상태를 이어 온 이탈리아는 기본소득을 앞세운 좌파 정부를 포함해 포퓰리즘 정당들이 돌아가며 집권하는 혼탁한 정치구도에 휘말려 왔다. 돈 풀기 정책이 부채를 키우고 과도한 부채는 성장을 낮추면서 저성장이 다시 부채를 늘리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저출산·고령화도 유럽 최악 수준으로, 65세 이상 노인 비율 27%는 세계 최고령국 일본에 근접하고 합계출산율 1.2는 유럽에서 바닥이며 우수 인재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으로 이탈하고 있다.
미국 대공황 시기에 국민소득과 국내총생산(GDP) 개념을 처음 도입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 전 하버드대 교수는 “세상에는 네 종류의 나라가 있다. 선진국, 후진국, 일본과 아르헨티나”라는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은 최빈국에서 선진국 입구까지 단숨에 달려온 저력을 가진 나라지만 쿠즈네츠가 예시한 네 종류 나라들의 병증을 두루 갖춘 안타까운 현실에 맞닥뜨리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낮은 저축률로 저성장 구도가 고착화하는 선진국병(病), 미래보다 과거 프레임에 집착하고 과학보다 괴담을 앞세우는 정치사회 풍토와 아직도 죽창가를 불러대는 퇴행성 후진국병, 국가 부채 급증과 경제 활력 감퇴에 따른 구조적 장기 불황으로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병, 그리고 파행적 노조 행태와 포퓰리즘 정책으로 반복적 경제위기의 골병에 시달려온 아르헨티나병이다.
복합적 합병증세의 결과는 1%대로 계속 떨어진 국내 잠재성장률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잠재성장률 추락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하위권이자 미국의 57%, 독일의 63% 수준의 낮은 노동생산성이 한몫한다. 더군다나 향후 10년은 지정학적 위험, 기후변화 위기 그리고 산업대전환 시대의 도전적 시기인 만큼 당면한 합병증의 근본적 치유 없이는 국가 미래가 없다. 3만 달러 덫에 걸려 OECD 회원국 평균인 4만 달러 진입에 실패한 나라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한 지금인데 오히려 재정 준칙 도입은 뒷전이고 예타 면제 확대에는 여야가 하나인 모습은 이탈리아 데자뷔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라는 명언은 지도자의 품격있는 언행을 강조한 경구다. 바른 정신과 품행 그리고 눈앞의 정치적 득실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과 전략이 국력의 기본이다. 장기 침체 우려를 불식시킬 비상계획 가동으로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는 정치리더십이 시급하다. 자칫 다가올 ‘잃어버릴 10년’을 피하려면 더더욱 그렇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