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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시간 즐기는 공간, 도심 속 ‘마음의 테라스’ 늘려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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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호 26면

POLITE SOCIETY 〈끝〉

칠레 칠로에 섬의 호텔 라운지. 공간에서 여유를 가지는 것은 삶에서 여유를 갖는 것이다. [사진 박진배]

칠레 칠로에 섬의 호텔 라운지. 공간에서 여유를 가지는 것은 삶에서 여유를 갖는 것이다. [사진 박진배]

9·11 테러로 지금은 무너진 뉴욕의 쌍둥이빌딩 꼭대기에 ‘세계를 보는 눈(Windows of the World)’이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오래전 어렵게 예약을 하고 흥분되는 마음으로 입장했지만 날씨가 흐려서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던 웨이트리스는 실망하는 우리 일행에게 웃으며 “그냥 구름밖에 안 보이는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고 지혜로운 조언을 건넸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면서 맨해튼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바로 눈앞에 펼쳐졌던 뉴욕 마천루들의 풍경은 이제까지 봤던 어느 전경보다도 힘차고 강렬했다. 불과 몇 분의 짧은 순간에 즐겼던 최고의 라운징이었다.

‘라운징(lounging)’은 특별한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행위다. 라운징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 라운지고, 그 안에 놓이는 의자가 라운지체어(chaise lounge)다. 르코르뷔지에나 찰스 이임즈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만든 명품 라운지체어들이 지난 수십 년간 인기리에 판매되는 걸 보면 라운징은 생활의 큰 ‘기능 아닌 기능(function without function)’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라운지 하면 쉽게 떠오르는 곳은 공항 라운지. 탑승 전에 시간을 때우는 장소다. 항공사마다 디자인과 시설, 제공하는 음식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애매한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라운징 중에서 시간개념이 도입된 대표적인 예는 브런치다. 아침 일찍 출근할 필요가 없는 주말,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도 점심도 아닌 시간을 보내며 노닥거리는 행위, 미국인들은 ‘브런칭(brunching)’이라는 표현을 쓴다. 브런치의 대상은 친구나 가족이지 직장상사일 경우는 절대 없다. 대화의 내용도 심각한 비즈니스가 아니고 편안한 일상의 소재가 대부분이다.

뉴욕 곳곳 돌·벤치 등 옥외 라운징 장치

뉴욕 FIT 대학 복도 공간. 공강 시간에 학생들이 햇볕을 쬐면서 라운징하는 장소로 인기다. 라운징은 짧은 틈을 내서 향유하는 달콤한 휴식이자 순간의 즐김이다. [사진 박진배]

뉴욕 FIT 대학 복도 공간. 공강 시간에 학생들이 햇볕을 쬐면서 라운징하는 장소로 인기다. 라운징은 짧은 틈을 내서 향유하는 달콤한 휴식이자 순간의 즐김이다. [사진 박진배]

프록터 앤드 갬블(P&G)은 아이보리 비누, 팸퍼스 기저귀, 질레트 면도기, 크레스트 치약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생활용품 생산기업이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위치한 이 회사의 본사건물에 ‘아이디어 룸(Idea Room)’이라는 방이 있다. 추억의 장난감과 보드게임, 각종 피규어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놀이도구가 구비된, 회사에서 가장 큰 공간이다. 화학자, 엔지니어와 과학자들, 소위 이과 출신 직원들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에서 휴식과 놀이를 즐기며 새로운 연구와 개발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몇 해 전 리모델링을 하면서는 사옥 전체 인테리어를 이런 ‘아이디어 룸’의 확장 개념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구글을 비롯한 많은 회사들 역시 이런 트렌드로 설계하고 있다. 과거에 업무 공간이 가장 중요했다면 요즈음은 이러한 라운징을 위한 공간이 중요하다는 인식의 결과다. 심지어 간혹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의 실수로 사무실 내부에 자투리 공간이 생기는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이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구체적인 기능이 없는 중성적 공간에서의 ‘머묾’이 주는 매력이다.

프랑스 샤토 클레멘테의 라운지. 과거 귀족의 저택에서는 본격적인 만찬 전에 손님들이 거실에서 담소하며 음료를 마시곤 했다. [사진 박진배]

프랑스 샤토 클레멘테의 라운지. 과거 귀족의 저택에서는 본격적인 만찬 전에 손님들이 거실에서 담소하며 음료를 마시곤 했다. [사진 박진배]

라운징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상류층 클럽 문화를 보면 내부에 작은 서재와 레스토랑, 피아노 룸, 간단한 사무실과 응접실, 카드 룸 등이 갖추어져 있다. 특별한 기능보다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공간들의 조합이다. 현재도 많은 사교클럽들이 이런 방들을 마련하고 라운징의 문화를 이어 가고 있다. 또한 과거 귀족의 저택에서는 본격적인 만찬 전에 손님들이 거실(parlour)에서 대기하며 담소하며 음료를 마시곤 했다. 그러한 형식이 상업적인 레스토랑이 탄생하면서 식전주를 마시고 테이블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라운지로 발전했다.

실제로 프랑스 등 유럽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는 식사 전에 라운지로 먼저 입장을 한다. 거기서 식전주와 아뮈즈부슈(amuse-bouche, 입을 즐겁게 한다는 뜻의 식전 간식)를 즐기면서 메뉴와 마실 와인을 선택한 후 천천히 다이닝의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대표적인 라운징의 형태다. 이 공간과 라운징의 형식이 간편화된 형태가 미국의 캐주얼 문화에 걸 맞는 바(bar)다.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고 식사 전에 머무는 완충공간이자 짧은 라운징을 즐기는 시간인 셈이다.

라운지로 먼저 입장해 식전 간식 즐겨

프랑스 도메인 오트 르와르 호텔. 라운지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응용되어 현재도 많은 클럽과 호텔들이 이러한 방들을 마련하고 라운징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 박진배]

프랑스 도메인 오트 르와르 호텔. 라운지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응용되어 현재도 많은 클럽과 호텔들이 이러한 방들을 마련하고 라운징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 박진배]

뉴욕은 계속해서 도심에서 차량을 몰아내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맨해튼으로 진입하는 다리와 터널은 늘 정체지만 그 수를 늘리지 않고, 통행료를 계속 높이는 식이다. 시내의 많은 도로도 보행자 전용으로 교체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와 같은 도심의 유명 지역 곳곳에 돌과 벤치 등 옥외 라운징을 위한 장치를 심어 놓았다. 라운징은 오랜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다. 일상의 틈을 내서 짧게 즐기는 과정이다. 그래서 라운징의 시간이 쾌적하려면 세심하게 계획된 공간디자인이 매우 중요하다.

백화점을 비롯한 많은 패션매장 한 곳에 쾌적한 소파가 배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동반한 여성이 쇼핑하는 시간 동안 남성들이 편하게 쉬면서 기다릴 수 있도록 한 배려다. 리테일 공간의 인테리어디자인에서도 빠지지 않고 강조되는 디테일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설치된 매장의 소파는 남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아마 매장 전체에서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점이자 오브제일지 모른다. 공항, 호텔, 경기장 등에 설치된 구두 닦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틈새의 시간을 위한, 하지만 자신의 구두가 광을 내는 동안 앉아서 짧은 라운징을 즐길 수 있는 신사들의 공간이다.

라운징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고 향유할 수 있는 곳들도 다양하다. 동물원과 식물원, 미술관도 쾌적한 라운징을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들이다. 도심의 가까운 곳에 마땅한 잉여 공간이 없을 때 인위적으로 구조물을 만들어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팝업으로 설치되는 환경예술작품이나 스트리트 퍼니처들이 이에 해당한다. 라운징은 휴가나 여가생활과는 다른 개념이다. 바쁜 도시생활에서 짧은 틈을 내서 향유하는, 꿀같이 달콤한 휴식이자 순간의 즐김이다. 그래서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방해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공공장소에서의 상식적인 에티켓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0세기 초 디자인의 기능주의는 한 치의 낭비 없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가치기준을 확립했다. 더 넓은 평수를 찾는 요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형편상 면적은 늘 제한된다. 당연히 특별한 기능이 없는, 또는 중요하지 않은 공간은 과감하게 삭제되곤 했다. 그 결과로 우리의 하루하루도 기능적 공간에서 다른 기능적 공간으로의 이동 속에 흘러가도록 설계됐다. 건물로 진입하자마자 엘리베이터, 다음으로는 사무실, 회의실, 식당 등 다른 용도의 공간을 옮겨 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딱 그 삭제한 공간만큼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라운징의 문화를 잃어버렸다.

세계적인 트렌드인 노마드의 라이프스타일을 수용할 수 있는 멋진 도시가 되려면 곳곳에 라운징의 장소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집에서건 사무실에서건 다른 스타일의 공간은 다른 생각의 순간을 제공한다. 공간에서 여유를 가지는 것은 삶에서 여유를 갖는 것이다. 잠시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미학, 이 얼마나 멋진 여유인가? 인생에서 조그마한 공간과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의 합은 그리 적지 않다. 라운징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의 테라스가 필요하다. 안단테는 멋이다.

박진배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연세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공부했다. OB 씨그램 스쿨과 뉴욕의 도쿄 스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공간미식가』, 『천 번의 아침식사』 등을 쓰고, 서울의 ‘르 클럽 드 뱅’, ‘민가다헌’을 디자인했다. 뉴욕에서 ‘프레임 카페’와 한식 비스트로 ‘곳간’을 창업,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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