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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와 불화로 퇴사, 청년 모차르트의 ‘해방 일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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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호 22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헨리 넬슨 오닐 ‘모차르트의 최후’(1860). [사진 사회평론]

헨리 넬슨 오닐 ‘모차르트의 최후’(1860). [사진 사회평론]

주위에 음악을 한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정작 연주나 작곡만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은 언감생심,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자신의 선택이니 특별히 이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모차르트라면 어떨까. 음악만 해서 살기 어려웠던 것은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려서는 세기의 신동이라는 칭송을 얻으며 유럽 각국의 궁정에서 환대를 받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에게 절실했던 것은 명성이 아니라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할 직장이었다.

사설 오케스트라도 음악학교도 없던 시절 음악가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직장은 귀족이나 왕족의 궁전에 속한 궁정 음악가였다. 그러나 말이 좋아 음악가이지 궁정 음악가는 하인이나 시종과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나마 모차르트에게는 이런 자리 하나 얻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음악적 능력이야 차고 넘쳤지만 아무도 모차르트가 군주의 심기를 살펴서 기분을 맞추어야 하는 하인 역할을 잘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인 취급 견딜 수 없었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유럽 왕족들의 궁정에 취업하는 것에 실패하고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선제후 궁정의 음악가가 되었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대주교가 다스리는 가톨릭 교회령으로 도시 규모는 크지 않았어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곳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십대 중반에 이런 곳에 취직을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을 수도 있겠으나 정작 모차르트 자신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유럽의 화려한 대도시들을 다니며 최첨단의 문화를 경험한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는 그저 시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고용주였다.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알리라. 직장 스트레스의 주범은 바로 상사라는 것을. 모차르트가 궁중에 취직한 직후 새로 부임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든 면에서 그와 맞지 않았다. 개혁 군주로 평가받는 콜로레도 대주교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강력한 긴축 재정을 실시하면서 극장 같은 연주 장소를 폐쇄했을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악기 연주를 금지했다. 그러니 모차르트의 음악 활동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유독 모차르트에게 매우 엄격해서, 콧대가 높은 이 젊은 음악가에게 복종이라는 미덕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는 모차르트를 다른 하인들과 똑같이 대우했고, 아무 때나 부르면 와서 연주할 수 있도록 늘 대기 상태로 있게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귀족들의 찬사와 환대에 익숙했던 모차르트에게 이런 상황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빈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묘비 ⓒinvisigoth67. [사진 사회평론]

빈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묘비 ⓒinvisigoth67. [사진 사회평론]

고통이 때로는 긍정적 결과를 낳기도 한다. 직장 생활이 괴로운 모차르트에게 유일한 낙은 작곡뿐이었다. 그 덕분에 14곡의 교향곡을 비롯해 주옥같은 협주곡과 실내악 작품들이 이 때 만들어지게 된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섬뜩한 오프닝 장면에 나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된 ‘교향곡 25번’도 이 시기 17살의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상황은 더 나빠졌다. 콜로레도는 미사곡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연주 시간과 곡의 순서까지 제약하기 시작했고, 모차르트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큰물에서 성공하고 싶었던 모차르트는 자신을 잘츠부르크에만 가두려는 콜로레도를 원망했고, 반대로 콜로레도는 자꾸 타지를 기웃거리는 모차르트가 탐탁지 않았다.

결국 21살의 모차르트는 사표를 내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잘츠부르크를 떠났다. 만하임을 거쳐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가 작품을 발표하고 연주를 들려줄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유일하게 제시받은 일자리는 베르사유궁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 여행에 동행했던 어머니가 파리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졸지에 타국에서 어머니를 잃은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콜로레도는 모차르트를 궁에 다시 받아주었을 뿐 아니라 연봉을 3배나 올려주고 연금까지 주었다. 공손하지는 않아도 비범한 모차르트를 신하로 거느린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큰 자랑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갈등은 봉합된 듯 보였다. 하지만 1781년 모차르트가 뮌헨의 카니발에 맞춰 올린 오페라 ‘이도메네오’가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갈등이 폭발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25살 생일과 초연 성공을 기념하는 성대한 축하연을 열었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지인들은 공연도 보고 파티도 즐길 겸 뮌헨으로 몰려왔다. 하지만 콜로레도는 뮌헨과 반대 방향인 빈으로 간 후 한참 인기가 상승 중인 모차르트를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심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차르트에게 헐값의 작품료만 주고 자기가 주최한 음악회에서 신작을 작곡해 연주하게 했다. 만약 그곳에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모차르트는 프란츠 툰 공작의 저택에서 열 배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거기 머물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에게 자신을 강하게 어필할 기회도 얻었을 것이다. 결국 모차르트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퇴사를 하고 만다.

그 후 모차르트는 제국의 수도인 빈에 정착해 고난과 성공, 그리고 다시 가난으로 이어지는 격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빈에서 일단 피아노 레슨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한편 새로운 개념의 음악회를 직접 기획했다. 왕족이나 귀족이 자기 궁정에서 베푼 ‘사적’ 음악회가 대세이던 시대에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적’ 음악회를 시도한 것이다. 사전에 프로그램을 공지하고 예약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도 미리 받았다.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자신의 작품만으로 채웠다. 연주회의 하이라이트는 모차르트가 직접 솔리스트로 나선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아직 음악회에서 피아노 솔로 연주가 없던 시절 모차르트가 직접 무대 위에 올라 현란한 연주를 펼쳤고 그 덕분에 그의 공연은 빈에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최고 음악가도 경제적 안정 보장 못 받아

로마에서 교황 클레멘트 14세로부터 받은 황금 박차 훈장을 달고 있는 모차르트의 모습 (1777년 경). [사진 사회평론]

로마에서 교황 클레멘트 14세로부터 받은 황금 박차 훈장을 달고 있는 모차르트의 모습 (1777년 경). [사진 사회평론]

하지만 그 성공은 5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은 더 새로운 재미를 원했지만 반대로 모차르트는 점점 더 진지하고 실험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예약 음악회 시리즈가 이렇게 막을 내렸을 때 다행히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원작인 피에르 보마르셰의 동명 연극이 귀족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풍자를 담고 있어 상연이 금지되었던 것과는 달리,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풍자를 당하는 귀족들조차 환호했을 정도로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다음 시즌을 위한 새 오페라를 위촉받아 걸작 ‘돈 조반니’도 탄생했다. 그리고 독일어 오페라의 신기원이 되는 ‘마술 피리’까지 작곡함으로써 장르를 가리지 않는 천재적인 실력을 다시 한 번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모차르트는 풍족하지 못했다. 저작권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 작곡가의 수익은 작곡료가 전부였으나 오페라를 통해 얻는 수입은 그가 만든 작품의 인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이 2차 러시아 투르크 전쟁에 끼어들면서 빈의 경제는 극도로 나빠졌고 음악 공연은 완전히 멈춰 버렸다. 돈을 쓸 줄만 알았지 관리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모차르트와 아내 콘스탄체는 가난에 쪼들리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빚까지 지기 시작했다. 돈이 궁했던 모차르트는 파격적인 보수를 받고 ‘레퀴엠’을 비밀리에 대작하다가 결국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에 대해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가난과 과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젊은 모차르트의 굴곡진 삶은 오늘도 직장에서 힘겹게 분투하는 우리 청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하루 모진 상사의 횡포와 변덕을 견뎌야 하고, 설사 뜻을 세우고 퇴사를 해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인내력이 부족하다는 질책뿐이다. 만약 모차르트가 콜로레도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했다면 어땠을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으리라.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니었을 테니까. 퇴사 후 10년간 고군분투하며 만들었던 그의 걸작들 역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년 모차르트에게, 그리고 그와 닮은 삶을 살아가는 오늘의 청년들에게도 늦게나마 뜨거운 응원과 감사를 보낸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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