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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유언장·장례 내 뜻대로 정해야 '멋진 마무리'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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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호 16면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 꼭 필요한 ‘소확행’ 활동 중 가장 권하고 싶은 게 자원봉사”라고 했다. 김상선 기자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 꼭 필요한 ‘소확행’ 활동 중 가장 권하고 싶은 게 자원봉사”라고 했다. 김상선 기자

원혜영은 경기도 부천에서 7선(選)을 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 5선(부천시 오정구)에다 민선 부천시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그는 2019년 12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나이 70에 제3의 인생을 살겠다”고 말한 그가 선택한 길은 ‘웰다잉문화운동’이었다. 웰다잉(Well-Dying)은 말 그대로 ‘잘 죽자’는 뜻이지만, 잘 죽기 위해서 남은 삶을 잘 마무리하자는 의미가 더 크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유언장을 미리 써 놓고, 유산의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사후 장기기증, 간소한 장례식 등도 이 운동에 포함돼 있다.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웰다잉 운동이 다시금 조명 받고 있다.

웰다잉문화운동 사무실은 서울지하철 2호선 시청역 앞에 있다. 그곳에서 원혜영 공동대표를 만났다. 평생 한 번도 이사하지 않은 부천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늘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했다.

유언장은 ‘고맙다, 사랑한다’ 표현하는 것

웰다잉을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라고 정의하면 될까요.
“죽음이라는 말의 이미지가 너무 압도적이고 거부감이 있으니까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핵심은 ‘내 뜻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연명치료를 받을지 말지, 장기 기증을 할지 말지, 장례 절차를 어떻게 할지, 재산을 어떻게 정리할지 등에 대해 미리 정해놓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미뤄두면 연명치료는 병원이, 장례 절차는 장의사가 결정하고, 유산에 대해서는 법원이 개입하게 됩니다.”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에 큰 역할을 하셨는데요.
“2008년 세브란스병원 김할머니 사건이 존엄사 논쟁에 불을 붙였죠. 식물인간이 된 할머니 가족이 연명치료를 거부했고, 대법원에서 ‘행복추구권에 기초한 자기결정권 행사’로 인정해 가족의 손을 들어줬어요. 그 뒤에도 연명치료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아서 제가 동료 의원들과 힘을 합쳐 2016년에 연명치료에 대해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160만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입니다.”
연명의료의향서를 조금 더 일찍 쓰면 좋겠다는 얘기들이 많습니다.
“맞습니다. 며칠 전 중앙일보에도 보도가 됐는데요. 오래 연명치료를 받은 뒤에 의식이 거의 꺼져갈 무렵에, 떠밀려서 벼락치기 하듯 연명의료의향서를 쓰는 경우가 많아요. 이건 원래 의도와 맞지 않는 거죠. 내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맑은 정신으로 내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언장 쓰기도 웰다잉문화운동의 중요한 요소죠.
“10년 전만 해도 이혼 소송이 상속 소송보다 훨씬 많았는데 지금은 역전됐어요. 내가 유언장을 안 써놨기 때문에 자식들이 자기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석하고 싸우는 겁니다. 또 유언장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핵심은 남은 가족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는 거죠. 주위에 유언장 쓴 사람이 1%도 안 돼요. ‘재산이라고 물려줄 것도 없는데…’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평생 노력해서 얻은 집 한 채, 땅 몇 평도 소중한 것이고, 그걸 깔끔하게 잘 나눠주는 게 중요합니다.”
유언장을 매년 새로 쓰신다면서요.
“일종의 세리머니죠. 한 해를 정리하면서 ‘올 1년도 건강하게 무사히 행복하게 잘 살았구나’ 감사하는 거죠. 그리고 재산이야 큰 변동이 없지만 생각이란 건 항상 바뀌잖아요. 내 마음가짐의 변화를 써 보는 게 나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유언장 쓰는 것에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유언장 써보기 캠페인’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한번 써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면 되고, 몇 년 뒤에 생각이 달라지면 고쳐서 쓰면 되거든요. 사회 경험이 풍부한 은퇴자들을 교육해 ‘웰다잉 지도사’ 같은 타이틀을 주고 유언장 쓰는 걸 돕게 하고 싶어요.”
유산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은데요.
“내 유산의 10분의1은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문화가 빠르게 확산될 거라는 기대감이 있어요. 서양과 비교해 우리는 산업화가 늦었기 때문에 크든 작든 재산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베이비부머 백만대군들이 60~70년대 갖은 고생과 노력으로 집 한 칸이라도 갖게 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죠. 그분들이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실 거라 기대합니다.”

평소 가족에게 내 뜻 존중해 달라 당부를

매장에서 화장으로 장묘문화가 바뀐 건 고무적인 일이죠.
“웰다잉 영역 중에서 유일하게 완성됐다고 보는 게 화장문화입니다. 90%가 넘게 화장을 하니까요. 이것도 SK그룹 최종현 회장님이 유언으로 화장을 지시하고, 500억원을 들여서 첨단 화장장 시설을 짓도록 한 헌신 덕분이죠. 20년 전만 해도 상갓집에 가서 ‘화장하느냐’고 못 물어봤어요.”
웰다잉을 위해서는 가족의 역할도 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는 문화가 있어서 자식들이 부모님께 유언장이나 연명의료의향서 쓰시도록 권유하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강연 다니면서 노인들께 물어보면 대부분 여기에 대해 개방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연명치료 안 받겠다고 의향서 쓴 분들이 쓰러져서 병원에 가면 자식들이 막무가내로 연명치료를 원하는 경우도 많아요. 평소에 충분하게 이해시키고 내 뜻을 존중해 달라고 당부하는 게 필요하죠. 응급실에 실려간 노인 중 중환자실로 이송되는 비율이 싱가포르는 10%인데 우리는 70%나 됩니다.”
웰다잉은 국가 재정과도 직결돼 있죠.
“한 해에 30만명이 사망하는데 사망 전 1년간 치료비가 인당 2000만원이 넘습니다. 요양병원을 포함해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이 70만명인데 이들에게 들어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장기요양보험 총급여는 11조가 넘습니다. 이중 10만명이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 연간 의료비 2조원이 절감됩니다. 또 연 100조 정도로 추정되는 상속액 중 10%만 사회기부로 돌릴 수 있다면 10조원이 모이고, 세금으로 할 수 없는 복지·문화예술·과학기술 분야 지원이 가능해집니다.”
이건 국가에서 책임지고 해야 할 일 아닌가요.
“문재인정부 때는 제가 여당 중진이었으니까 ‘이거 누가 하는 거냐’고 물어볼 수 있었어요.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라고 했다가, 사회수석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정책실장이라고 하는데 결국 똑 부러지는 담당이 없었어요. 2005년에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인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그나마 무게중심이 저출산에 맞춰져 있지요.”

원혜영 대표는 젠틀맨 국회의원에게 주는 백봉신사상을 받을 정도로 온화하고 소통 능력이 뛰어난 의원이었다. 여야가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정치현실에 대해 그는 “나라와 국민 전체를 보는 게 아니라 당장 가깝고 적극적인 지지층에만 의지하려는 게 문제”라고 안타까워했다.

현안이 된 국회의원 숫자와 선거법 개정에 대해서는 “의원 숫자보다 중요한 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 대립을 풀어갈 수 있는 ‘민의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라며 “그때그때 바뀌는 수치나 인기, 여론에 움직이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진정 필요한 게 뭔지, 어디에 힘과 예산을 집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해법을 도출하는 국회가 됐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몇 점 정도 줄 수 있는지 묻자 그는 “내 능력과 노력과는 상관없이 복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큰 어려움이나 과오 없이, 나름대로 의미 있게 살았으니까 80점 정도는 줘도 되겠죠”라며 웃었다.

부친이 일군 친환경·유기농산물, 굴지 기업으로 성장시켜

원경선

원경선

‘아버지, 참 좋았다’

원혜영 대표가 2013년 소천한 부친 원경선(사진) 선생과 함께한 이야기를 쓴 책의 제목이다. ‘친환경·유기농업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원 선생은 경기도 부천의 황무지를 개간해 ‘풀무원’이라는 농장을 만들고 전쟁고아·부랑아들을 불러모아 이들과 자급자족·동고동락했다. 원 선생은 오전엔 성경과 교양교육을 하고, 오후엔 영농기술과 양계법을 가르쳤다. 슬하의 7남매도 농장 식구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농사일을 하도록 시켰다.

일본 기독농민모임을 통해 유기농을 알게 된 원 선생은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농사를 짓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가 할 일이 아니다’고 결심하고 1976년 경기도 양주로 풀무원농장을 옮겨 유기농을 시작했다.

원 대표는 “아버님은 한 마디로 실천가였어요. ‘옳은 일이다. 필요한 일이다. 좋은 일이다’ 생각하면 어떡하든지 실천하려는 삶의 모습을 저도 본받으려고 노력했죠”라고 말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 두 차례 감옥을 갔다 온 원혜영은 아버지가 키운 유기농산물을 팔 생각을 했다. “저 인정받지 못하는 것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0.1%를 찾아 압구정동 고객에게 팔기 시작했죠. 그게 풀무원식품의 모체가 된 겁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방부제·항생제·착색제 등을 쓰지 않은 농산물과 두부·콩나물 등은 갈수록 시장이 커졌고, ‘바른 먹거리’를 앞세운 풀무원은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로 성장했다.

원 대표는 “풀무원 비즈니스 초창기는 지금의 웰다잉 운동과 비슷했어요. 낯선 개념이니까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겁니다. 하지만 신념과 원칙을 지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걸 체험하게 됐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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