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브 '키치'도 6명이 작곡했다…K팝 도약의 비결 '송캠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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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부터 2일까지 경기도 양평에서 국내 최대 규모로 열린 ‘원더월 디 에코 송캠프’. 사진 원더월

지난달 31일부터 2일까지 경기도 양평에서 국내 최대 규모로 열린 ‘원더월 디 에코 송캠프’. 사진 원더월

“곧 멜론 차트에서 뵙죠.”

지난 2일 경기도 양평군 블룸비스타호텔에서 열린 국내 최대 규모 ‘원더월 디 에코 송캠프’에서 만난 작곡가 김성현(28)씨는 호기로운 포부를 밝혔다. 이날은 2박 3일 동안 진행된 송캠프의 마지막 날. 4~5명으로 구성된 팀별로 이틀 동안 만든 완성 곡을 들어보며 평가하는 ‘리스닝 파티’가 열렸다. 팀 리더가 곡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마치면, 화려한 조명이 돌아가고 신나는 멜로디에 맞춰 다들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감각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와”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하이브와 CJ E&M 등 대형기획사 A&R(아티스트 앤 레퍼토리·음반 기획 총괄) 출신의 음반 기획자 김은정씨는 이번 송캠프에 멘토로 참가해 구체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청하를 위해 만들었다는 한 곡을 감상한 뒤엔 “청하 말고 선미는 어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다소 미흡한 작업에 대해선 “초반 작업에서 기대를 많이 했던 곡인데 개성을 잃은 것 같아 아쉽다”는 냉정한 말도 나왔다.

대세가 된 집단 창작 시스템 

활발한 송캠프를 통한 히트곡 만들기는 K팝 산업의 특징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창작에 몰두하는 1인 작곡가는 더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최근 K팝 작곡에 1곡당 적게는 3명 많게는 10명까지 붙는다. 한 숙소에 모인 뒤 각각의 방에서 서로 다른 곡을 만든다. 이후 음악에 관해 토론하고, 곡을 수없이 변형한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2주 정도 공동 작업에 몰입한 뒤 반드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걸그룹 아이브가 이달 발매한 ‘키치’의 경우 작곡가 6명이 작업했으며, 편곡에는 4명이 참여했다. 최근 대부분의 히트곡은 집단 창작이며 이들은 기여 글자 수대로 저작권 나눠 가진다. 해외에서도 작사, 작곡 협업을 볼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 기획사가 주도해 시스템으로 정착했다. ‘작곡가 캠프’로도 불린다. ‘

아이돌 연습생부터 공무원까지 협업

송캠프 참여자들은 2박3일 동안 팀별로 작곡한 완성곡을 내야 한다. 사진 원더월

송캠프 참여자들은 2박3일 동안 팀별로 작곡한 완성곡을 내야 한다. 사진 원더월

이번 ‘디 에코 송캠프’는 프로 작곡가뿐 아니라 아마추어 또는 지망생도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다만, 아무나 참가할 수는 없다. 기존에 작업한 데모 음악(샘플로 제작한 음악)을 제출해야 한다. 작곡에 어느 정도 진심인 이들로 추리기 위해서다. 그 결과 전체 지원자 102명 중 총 98명이 참가했고, K팝 작업 시스템에 맞춰 트랙메이커(반주부터 편곡까지 음악의 뼈대를 만드는 작곡가 겸 프로듀서), 탑라이너(멜로디를 만드는 작곡가), 올라운더(모든 분야를 다 맡는 사람)의 파트로 분류했다.

참가자 연령대는 20세부터 49세까지. 직업은 학생, 아이돌 연습생, 싱어송라이터, 무명배우, 광고회사 직원, 국세청 공무원까지 다양했다. 포르투갈에서 온 K팝 작곡가 지망생도 있었다. 원더월 측은 “참가자의 직업, 나이, 음악 취향, 심지어 MBTI까지 고려해 다양한 팀을 구성했다”고 전했다. 처음 보는 이들끼리 협업이 어렵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합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 레이블을 설립해 함께 일해야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이들도 있었다.

프로 작곡가 또는 작곡가 지망생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취미로 작곡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국세청 동울산세무서 국세조사관 우세훈(32)씨는 “개인적으로 음악을 좋아해서 퇴근 후 위스키 한 잔을 하며 온라인 작곡 강의를 보면서 공부해왔다”며 “혼자서 하다 보니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어 송캠프에 지원했고, 정말 잘 왔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좋은 곡은 5초면 판단”

김도훈 RBW 대표는 송캠프 참가자들에게 작곡가가 되는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원더월

김도훈 RBW 대표는 송캠프 참가자들에게 작곡가가 되는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원더월

참가비는 있다. 마스터에게 개인 질문을 좀 더 할 수 있는 VIP 참가자는 90만원, 일반의 경우 70만원을 내야 한다. 모든 참가자는 4성급 호텔에서 2박 3일 간 숙식을 제공받는다. VIP로 참여한 김다원(23)씨는 “유명 작곡가의 수업을 듣고, 다른 작곡가 지망생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 것에 비해 큰 비용은 아니라고 생각된다”며 “앞으로도 팀 멤버들과 교류하며 작곡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마스터로 참석한 김도훈 RBW 대표는 작곡가 지망생들에게 현실적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김 대표는 “좋은 곡을 판단하는 데에는 불과 5초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대중의 취향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어느 기획사에 소속된 어떤 가수, 이 가수가 어떤 노래로 성공했는지에 대한 포인트를 연구하는 것이 더 많이 선택받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모호하게 무작정 좋은 곡을 만들기보다 구체적으로 특정 가수를 위한 곡을 만드는 게 더 좋은 전략일 수 있다고 한다.

총 20팀의 곡 가운데 판매로 이어진 곡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원더월 관계자는 “판매 가능성이 높은 곡이 다수 있었다. 멘토들 역시 완성된 데모곡 수준으로 기획사에 제출할 만한 곡들이 많았다는 피드백을 줬다”며 “일주일 수정 기간을 거쳐 완성도를 높인 뒤 퍼블리싱(유통)으로 연결할 예정이다”라고 귀띔했다.

원활한 협업 위해 소통은 필수   

레드벨벳, 태민, 메이브의 곡을 만든 맥스송은 실제 작업기를 공개하며 “작곡가의 색깔을 분명히 담아 트랙의 전체 이미지를 만들 것”을 강조했다. 사진 원더월

레드벨벳, 태민, 메이브의 곡을 만든 맥스송은 실제 작업기를 공개하며 “작곡가의 색깔을 분명히 담아 트랙의 전체 이미지를 만들 것”을 강조했다. 사진 원더월

가요 관계자들은 송캠프가 보편화 된 이유에 대해 빠르게 변하는 음악 트렌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분산하는 공동 작곡이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개인 작곡가의 창의성이 최상의 상업적 가치를 발휘하는 기간은 5~10년 안팎이다. 하지만 다른 작곡가와의 협업하면 이 기간을 훨씬 연장할 수 있다. 이수만 전 SM 총괄 프로듀서는 일찌감치 SM에 송캠프를 도입해 활용해왔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공동 창작이라고 해도 각자 공간에서 일하다가 프로듀싱할 때 만나는 정도였는데 송캠프는 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브레인스토밍하며 압축적으로 노동의 결과물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또 “K팝에 다양성과 고난도 콘텐트를 요구하면서 이러한 방법이 나온 건데, 한국의 수직적 문화가 혹여 창의성을 제한할 우려도 있기 때문에 어떤 소통 시스템을 구축할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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