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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맞은 듯 불에 탄 마을…지붕 덮은 철판도 바람에 날아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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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1일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경포호 인근 펜션 밀집 지역을 덮쳐 큰 피해가 났다. [뉴시스]

11일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경포호 인근 펜션 밀집 지역을 덮쳐 큰 피해가 났다. [뉴시스]

‘쿠와아아앙, 쾅쾅.’

강릉 산불 발생 5시간이 지난 11일 오후 1시쯤, 태풍급 강풍이 휘몰아치자 비행기가 이륙하는 듯한 소음이 숲을 가득 채웠다. 곳곳에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겨우 살아남은 높이 10m가 넘는 나무에도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었다. 시야가 닿는 지표면 전체가 붉은 화염에 둘러쳐져 있었다. 하늘은 희뿌연 연기가 가득 채웠다.

강릉시 안현동의 한 마을에선 성 모양의 2층짜리 펜션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새카맣게 불에 타 있었다. 순간 강한 바람이 불자 지붕 위에 있던 철판이 통째로 날아가 인근에 주차된 자동차를 덮쳤다. 내부 집기류는 흔적도 없이 모두 불에 탔다. 50m가량 떨어진 목조 펜션은 아예 지붕이 주저앉았다. 펜션 뒤쪽 한옥도 모두 불에 타 마을 전체가 마치 폭격을 맞은 듯했다. 한옥 주인 최호영(75)씨는 “40년 넘게 산 곳인데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 못 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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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은 이날 오전 강릉시 난곡동 산24-4에서 시작됐다. 최초로 불을 발견했다는 조운현(69)씨는 “오전 8시쯤 TV를 보던 중에 갑자기 정전이 돼 문을 열고 나갔더니 소나무가 전선 위로 쓰러지고 뿌연 연기가 났다”며 “바로 밑 고사리밭으로 불이 번져 삽으로 흙을 뒤엎으며 불을 껐는데, 바람이 너무 거세 끄지 못했다. 사람이 날아갈 만큼 바람이 불었다”고 전했다. 조씨의 집과 차량 2대는 모두 불에 탔다.

문화재청은 불길이 경포대 인근까지 번지자 현판 7개를 떼어내 오죽헌박물관으로 옮겼다. [연합뉴스]

문화재청은 불길이 경포대 인근까지 번지자 현판 7개를 떼어내 오죽헌박물관으로 옮겼다. [연합뉴스]

오후 1시30분쯤엔 화선이 8.8㎞에 달했다. 강릉시 전역에서 글자 그대로 사투(死鬪)가 벌어졌다.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번진 불 때문에 주민들은 대부분 맨몸으로 불타는 마을을 떠나야 했다. 강릉시 저동에 사는 김영삼(52)씨는 “오전 8시30분쯤에 멀리 골프장 근처에서 연기가 보였다. 설마 여기까지 올까 싶었는데 30분 만에 집 근처에 불길이 보여 가족들과 맨몸으로 대피했다. 집과 펜션 3개 건물이 다 불에 탔다”고 말했다. 안현동 주민 최내규(78)씨는 “불길이 집까지 번지는 걸 보고 빠져나오니 옆집은 이미 타고 있었다. 동네가 불바다다. 집에 강아지도 두고 나왔는데 손녀가 ‘강아지를 왜 못 구했냐’며 눈물을 흘리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울먹였다.

대피령에 따라 500여 명의 주민은 아이스아레나에 마련된 임시대피소 등으로 피했다. 김종호 기자

대피령에 따라 500여 명의 주민은 아이스아레나에 마련된 임시대피소 등으로 피했다. 김종호 기자

주민들은 강풍에 날리는 불씨, 연기와도 싸워야 했다. 강릉시 저동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이모(44)씨는 “대피하는 동안에도 불씨가 자꾸 날아와서 차가 폭발하지 않을까 공포에 떨었다. 연기 때문에 바로 앞차도 안 보이고 비상등만 겨우 보였다. 30분을 달려서야 시야가 확보됐다. 펜션은 거의 전소 상태”라고 말했다.

불길이 번지는 방향에 있는 학교와 병원에 있던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안현동 경포대초등학교 학생 71명과 병설유치원 원생 11명은 화재 발생지와 거리가 먼 초당초등학교로 대피했다. 이어 오전 10시쯤 모든 학생을 학부모에게 인계했다. 김동원 경포대초 교장은 “오전 9시가 조금 안 됐을 때 이미 서쪽 하늘에서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며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신영초와 연곡초, 사천중 등 강릉시 9개 학교가 단축 수업을 했다. 교직원들은 학생들이 귀가한 뒤 학교 담장 등에 물을 뿌리며 불이 번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발화지점으로부터 약 1㎞ 떨어진 강릉율곡병원은 강풍에 외벽이 뜯겨나가는 피해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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