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2회 연속 동결했다. 지난 2월에 이어 ‘일단 멈춤’ 기조를 이어가기로 했다. 물가 상승세가 둔화하고 있는 데다, 그간의 금리 인상 여파 등으로 하반기 경기 회복이 더딜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은은 추가 인상 가능성을 강조했지만, 시장은 연내 인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한은은 11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3.5%로 유지하기로 했다. 금통위원 6명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이다. 지난 2월 3.75%로 인상을 주장했던 ‘매파(통화 긴축 선호)’ 조윤제 위원마저 이번엔 동결로 돌아섰다.
금통위원 6명 만장일치로 기준금리 3.5% 동결
2연속 금리 동결의 가장 큰 배경은 예상에 부합하는 물가 둔화 흐름이다. 지난해 7월 6.3%까지 치솟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이후 완만하게 하락하다 지난 2월 4%대에 접어들었다.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2%로 전월(4.8%)보다 0.6%포인트 떨어졌다. 한은은 이 흐름대로라면 하반기 들어 물가 상승률이 3%대로 낮아지고, 연간으론 2월 전망치인 3.5%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금융시장 불안이 심화한 것도 동결 결정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창용 한은 총재는 시장에서 연내 인하 가능성이 나오는 데 대해선 “과도하다”고 일축했다. 이 총재는 이날 금통위 후 기자간담회에서 “물가가 안정될 것으로 안심하기는 이른 상황”이라며 “긴축 기조를 상당 기간 이어가면서 추가 인상 필요성을 판단해 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과 마찬가지로 향후 3개월 내 최종금리 수준에 대해 금통위원 6명 중 5명이 “3.75%까지 인상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가가 잡히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의 물가안정 목표(2%)와 거리가 있다. 또 최근의 물가 상승률 둔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급격하게 치솟았던 국제 유가가 하락하면서 ‘기저효과’가 나타난 영향이 크다. 향후 국제 유가 변수, 공공요금 인상에 따라 물가가 또 한번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특히 물가 변동의 장기적 추세를 나타내는 근원물가 상승률은 둔화가 더디다는 점이 부담이다. 근원물가는 일시적 변동성이 큰 식료품 및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 지수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실물 경제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다. 한은에 따르면 3월 근원물가 상승률은 4%로 전월과 같은 수준이었고, 연간으론 2월 전망치(연중 3%)를 다소 상회할 가능성이 크다. 전기ㆍ가스 요금의 인상 기조가 이어지는 점, 코로나 거리두기 해제로 서비스 물가 상승 압박이 여전하다는 점 등도 한은이 눈여겨 보는 변수다.
한은 “올해 경제 성장률, 2월 전망치(1.6%) 소폭 하회할 것”
하지만 시장은 2021년 8월부터 시작된 금리 인상 레이스가 사실상 끝났다고 보고 있다. 경기가 더 얼어붙을 수 있어서다.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전분기 대비)은 수출 부진 등에 이미 지난해 4분기 마이너스(-0.4%)로 돌아섰고, 올해 1분기 역성장 탈출 여부도 불투명하다. 1∼2월 경상수지는 11년 만에 두 달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통관기준 무역수지도 3월(-46억2000만 달러)까지 13개월째 적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2월이 금리를 올릴 마지막 기회였고, 하반기로 갈수록 경기 때문에 뒤늦게 금리를 올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경기가 더 안좋아진다거나 물가가 2%대로 내려앉는다면 10월 이후 기준금리를 인하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한은도 이번 동결 배경으로 경기 둔화를 언급했다. 이번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는 “올해 경제 성장률이 지난 2월 한은 전망치(1.6%)를 소폭 하회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문구가 새로 추가됐다. 다만 이 총재는 “반도체 경기가 어렵지만 하반기에 반도체 가격이 상승하지 않을 거라고 보기도 어렵고, 정보기술(IT) 분야를 제외하고 올해 성장률을 계산하면 1.9% 정도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말에도 IT 외 다른 분야의 성장률이 견고하다면,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결코 나쁜 수치가 아니다”라며 “그럼 이를 금리 인하로 대응해야 할지 시장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ㆍ미 기준금리 역전폭 1.5%포인트, 역대 최대
향후 기준금리에 영향을 미칠 가장 큰 변수는 환율이다. 이번 결정으로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격차는 1.5%포인트를 유지하게 됐다. 2000년 5~10월 이후 22년여 만에 최대 역전 폭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5월에 한 번 더 베이비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을 밟을 경우 한미 금리 격차는 1.75%포인트로 더 벌어진다. 미국과 기준금리 차이가 크게 벌어지면 기축통화(국제 결제ㆍ금융거래의 중심이 되는 화폐)인 달러 가치가 오르고, 국내 자금은 빠져나가 원화 가치는 떨어질(환율은 상승) 수 있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입 가격을 비롯한 물가가 오를 수 있다.
이 총재는 ‘적정한 한미 금리 격차’는 없다고 강조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면서 한미 금리 차가 원화 절하 압박을 더 키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원화 가치 절하는 수출 부진 등 무역수지 악화의 영향도 큰데, 이로 인한 외환시장의 불안이 커진다면 한미 금리 격차를 좁히기 위해 한은이 기준금리 인상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총재는 “특정 환율 수준에 관계없이 변동성이 클 경우엔 금리뿐 아니라 다른 여러 정책을 통해 대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