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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보다 싼 마약…보이스피싱·살인·성착취와 '무서운 콜라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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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진화하는 마약범죄 ①

경기남부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지난해 5월 대마 재배 및 판매 혐의로 김모(28)씨 등 일당 5명을 붙잡았다. 2021년 8월부터 서울 양평동 일대에 전문적으로 대마 재배시설을 갖추고, 2억9170만원 어치의 대마를 판매한 혐의였다. 검거 현장에선 4300만 명이 흡입할 수 있는 대마 13.1kg이 발견됐다.

그러나 범행의 규모와 과감성보다 정작 수사당국의 눈길을 더 끈 건 이들의 마약판매 방식이었다. 김씨 등이 불법 코인 거래 사이트를 차려놓고 마약값을 받는 통로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사이트 설계자인 김씨는 마약 구매자들에게 평균 5%의 송금 수수료까지 받아 챙겼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대마에 다크웹, 코인 범죄가 조직적·유기적으로 결합된 사건”이라며 “유명 거래소를 쓰면 남는 개인정보 추적을 피하는 동시에 비트코인을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돈 세탁까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10일 구속기소된 마약판매상 출신 미국 영주권자 장모(49)씨가 지난해 9월 이삿짐에 숨겨 부산항으로 들여온 필로폰 3.2kg과 45구경 권총 1정, 실탄 50발, 모의권총 6정. 사진 서울중앙지검 마약범죄특별수사팀

10일 구속기소된 마약판매상 출신 미국 영주권자 장모(49)씨가 지난해 9월 이삿짐에 숨겨 부산항으로 들여온 필로폰 3.2kg과 45구경 권총 1정, 실탄 50발, 모의권총 6정. 사진 서울중앙지검 마약범죄특별수사팀

마약이 ‘하이브리드 범죄’의 촉매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에도 마약은 성 착취 등 다른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최근 마약을 매개로 한 신종 범죄들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고, 빈도가 잦아졌다는 게 수사당국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마약에 접근하기 너무나도 쉬워진 시대상이 범죄에 반영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강남 마약 음료 사건과 유사한 사고를 예방·신고해달라는 경찰청 홍보 포스터. 사진 경찰청

강남 마약 음료 사건과 유사한 사고를 예방·신고해달라는 경찰청 홍보 포스터. 사진 경찰청

지난 3일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일어난 마약음료 사건 역시 하이브리드 마약 범죄의 전형이다. 10대 학생들에게 무작위로 필로폰이 든 음료를 먹인 뒤, 이를 빌미로 학부모를 협박하는 수법이 전례 없는 유형의 사건이다. 사건 초기 피해자 규모도 가늠하기 어려운 형태였기 때문에 경찰 수뇌부도 이례적으로 빠르게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일주일 간 수사가 진행된 뒤 경찰은 이 사건의 성격을 ‘마약과 보이스피싱이 결합된 신종 범죄’로 규정했다. 중국에 있는 총책이 점조직 형태로 제조책과 유통책을 두고 마약 음료를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했다. “자녀가 마약한 것을 신고하기 전에 최대 1억원을 입금하라”는 협박전화는 중국에서 발신돼 국내 변작 과정을 거쳐 학부모에게 걸려왔다. 경찰은 음료를 나눠준 일당과 음료 제조책 등 6명을 검거하고 중국에 체류 중인 ‘윗선’ 2명을 추적 중이다.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이 마약을 매개로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범죄’ 양상을 띤 것이다.

지난해 5월 경기남부경찰청이 검거한 대마 재배·판매 일당 5명이 마약대금을 받기 위해 운영한 불법 코인 거래 사이트. 사진 경기남부경찰청

지난해 5월 경기남부경찰청이 검거한 대마 재배·판매 일당 5명이 마약대금을 받기 위해 운영한 불법 코인 거래 사이트. 사진 경기남부경찰청

 마약이 성범죄나 납치 등 다른 범죄의 도구로 사용되는 전통적인 결합도 날로 늘고 있다. 지난달 29일 강남 한복판에서 일어난 역삼동 납치·살인 사건에도 마약이 쓰였다. 피해자의 어깨와 다리 등에서 마약류 마취제인 케타민 추정 약물이 주사된 흔적이 발견됐다. 경찰은 9일 피의자 이경우(35·구속)에게 마취제를 제공한 혐의(마약류 관리법 위반)로 그의 아내 A씨를 입건했다. 술이나 커피, 콜라 등에 몰래 마약을 타고 성추행·성폭행을 저지르는 ‘퐁당 마약’은 강남 등지의 클럽 등을 중심으로 확산 일로다. 마약은 피해자를 그루밍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수원고등법원은 지난 2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여고생 B양을 가출시켜 필로폰을 투약하고 성인 남성 20여 명과 성매매를 강요한 20대 남성에게 1심과 동일한 징역 9년 6개월을 선고했다. B양은 당시 마약 부작용으로 뇌혈관이 터져 반신불수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범죄에서 마약이 하이브리드의 촉매로 급격히 부상하는 건 마약 접근성이 최근 극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미 1만~3만원이면 불과 몇분 만에 대마(0.1~0.5g)·필로폰 1회 투약분(0.03~0.05g)을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 자리잡았다. 마약 1회분이 피자·치킨보다 저렴해진 것이다. 중앙일보가 이날 접근한 여러 텔레그램 마약상들의 가격표에는 대마 1g이 20만~30만원, 필로폰 1g이 60만~70만원으로 책정돼 있었다. 구매량이 더 많으면 단가가 떨어졌다. 임상현 마약중독치유재활센터 경기도다르크 센터장은 “2010년대 필로폰 1g은 100만원을 호가했지만 지금은 순도가 낮다면 10만~30만원에도 구할 수 있다. 순도 낮은 마약일수록 뇌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텔레그램에서 구독자 2000명 이상의 마약상을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김정민 기자

텔레그램에서 구독자 2000명 이상의 마약상을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김정민 기자

높아진 접근성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경찰청에 따르면 인터넷·SNS를 통한 마약 유통·투약 검거자는 2018년 1516명에서 지난해 3092명으로 매년 꾸준히 증가했다. 트위터·텔레그램 등 해외 SNS를 통하면 터치 몇 번으로 마약을 구할 수 있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단속된 마약사범은 1만8395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올해는 1~2월 두달 동안에만 2600명이 검거됐다. 본격적으로 1만명대를 넘어선 2015년 이후 7년 만에 2만명에 육박한 것이다. 같은 기간 마약류 압수량은 176.9㎏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12.4㎏)보다 57.4% 증가했다. 검·경은 국내 상습투약자를 약 55만 명으로 추산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해 11월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마약 단가 자체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피자 한 판 가격까지 갔다”며 높아진 접근성을 마약 확산의 주된 원인으로 꼽은 적이 있다. 정부는 2월 전국 4대 권역 검찰청을 중심으로 관세청·지방자치단체 등과 협력하는 마약범죄 특별수사팀(84명)을 꾸렸지만 충격적인 마약 사건이 이어지자 10일 특단의 대책을 내놨다. 공무원 800여명으로 구성된 범정부 마약범죄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한 것이다. 신봉수 대검 반부패·강력부장과 김갑식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형사국장이 공동본부장을 맡고 검찰 377명, 경찰 371명, 관세청 92명 등 840명의 전담인력이 특수본에 배치됐다. 특히 청소년을 상대로 한 마약공급 사범에 대해선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마약류관리법에 따라 무기 또는 징역 5년 이상의 가중 처벌 조항을 적용할 계획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윤해성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결국 마약 유통을 방치하니 청소년에게까지 온갖 변종 범죄의 마수가 뻗치는 것”이라며 “사생활 침해라고 막아둔 온라인 수색 등을 하루 빨리 허용하는 등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기범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마약을 매개로 한 보이스피싱·성범죄 등 하이브리드 범죄가 진화하는 환경에선 그에 맞는 대응법 공조가 필요하다”며 “일반 정부 부처에서도 수사기관이 고안한 범죄 예방, 법률 개정안 등을 참고해 정책을 짜는 협업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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