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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6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제3부 남로당의 궤멸/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1년동안 산속에 감금당해/모든 것에 염증느껴 불현듯 자살충동 일어
산속에 감금당한 가운데 해가 바뀌었다. 봄이 오고 나뭇가지에 새 잎이 피어나며 얼어붙었던 개울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척촉꽃이 피어 온 산이 빨갛게 됐다. 만물이 소생하는 그 아름다운 봄이 찾아왔어도 나의 마음은 얼어붙은대로 풀리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고 문밖에 나서면 똑같은 시간에 흰 여객기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여객기는 평양에서 청진으로 가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평양이 왼편 남쪽이고 청진이 오른편 북쪽이란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뜨는 방향과 나무그늘로 동서를 구분,내가 있는 곳이 평양 북동지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평양에서 몇리나 떨어져 있는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년이나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단 둘이 사니 밥해주는 할머니와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 할머니는 46년까지 만주 간도에서 살았는데 아들은 김일성 장군의 대원이었다. 37년에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대원으로 전사했다면 훈장도 받았을 것이요,할머니는 혁명가 유가족으로 연금도 받아 편안히 잘 살 것인데 왜 이런 산골에 와서 식모짓을 하며 고생스럽게 사느냐?』하니 『아니오. 사람이 달라요.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 아들이 죽은 곳도 아는데 무덤하나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하며 말을 더 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 형님도 중국에서 죽었는데 묘도 없다』하니 그때부터 그 할머니는 나에 대해 감시하는 눈초리가 변해갔다. 굴밤나무밑의 보초막을 물으니 『이번 전쟁에 포로가 된 높은 사람이 여기 있을때 쓰던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차차 알게되자 할머니의 태도는 완연히 달라져 갔다. 아무쪼록 건강에 주의해 살아서 풀려나가도록 하라고 위안도 해주었다.
또 부대에 보고하지 않을 터이니 산에 올라가서 마음대로 산보하고 오라고 권유도 했다.
54년 가을이 와 나뭇잎에 단풍이 들어도 풀려날 가망성은 보이지 않았다. 군관이 종종 와서 할머니에게 나에 대한 보고를 듣고 가곤 했다.
고향생각이 간절해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가만히 문을 열고 집뒤 언덕에 올라 홀로 앉아 달을 쳐다보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어디론가 뛰어가고 싶었다. 남쪽을 쳐다보니 검은 산봉우리가 첩첩 싸여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고는 도저히 한발도 뗄 수가 없었다.
아버지·어머니의 얼굴,처와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실컷 울고나니 이 세상사가,혁명이고 정치고 모든 것이 다 허무하며 싫어졌다. 살아있는 생명까지 싫어졌다.
집뒤의 새끼를 주워 굴밤나무 가지에 목매 죽고 싶은 생각이 불시에 일었다. 새끼를 목에 걸어봤다. 순간적으로 눈물덩어리가 확 쏟아지는 것이었다.
아! 여기서 내가 자살하면 김일성 도당은 미국의 간첩이라고 말없는 나를 몰아 세우겠지. 『아니다. 나는 충직한 조선애국자다!』 고함소리가 나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동시에 어머니의 얼굴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김일성에게 목을 졸려 죽을 때까지 살아있어 보자. 내가 미리 죽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했다. 달을 쳐다보니 하늘도 달도 차가워 보였다.
이북땅은 왜 이렇게도 차가운가. 어느 하나 나를 동정해주는 사람도 없다. 이승만 정권이 아무리 빨갱이를 잡아죽여라 하여도 이남땅에는 인정이 있었다. 김일성 세상에 비하면 사람이 사는 세상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은 역시 나의 마음의 고향이다. 죽어도 서울을 쳐다보고 죽자. 개성에서 서울로 침투해 가라할때 차라리 갔더라면…. 그러나 김일성의 첩자로서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내가 김일성의 부하로서 남조선 정권을 전복하면 그날은 내가 바로 죽는 날이다. 내가 당의 깃발을 지하에서 생명을 걸고 지켜내니 김일성과 이승엽은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나를 총살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나를 중앙당 간부부 부부장자리에 추천한 것까지 김일성은 거부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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