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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채권 22조 휴지조각 후폭풍…금융권 자금 조달 비상등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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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호 14면

우려 커지는 신종자본증권

“뱅스터(뱅커+갱스터)의 자산을 팔아라.” 지난 4일(현지시간) 진행된 크레디트스위스의 주주총회에 참석한 한 일반 주주는 회사가 매각되는 상황에서도 현 경영진이 유임되는 모습에 분노하며 이렇게 말했다. 파산 위기까지 몰렸던 크레디트스위스는 UBS에 강제 인수되는 과정에서 자본성 증권(신종자본증권, 코코본드, 후순위채 등)인 ‘추가 티어1(AT1)’ 채권 170억달러(약 22조2000억원)가량을 상각했다. 이에 보유 중이던 채권이 휴지조각으로 변한 채권자들은 소송에 나선 상황이다.

자본성 증권은 기본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채권을 뜻한다. 보통 만기가 30년 이상이며, 유사시 주식으로 전환되거나 상각할 수 있는 조건이 붙는다. 은행 건전성 감독 기준인 바젤III에서는 이런 자본성증권을 자본 건전성 평가시 자본처럼 인정한다. 문제는 이번 사태에서 크레디트스위스의 주식보다 채권인 AT1이 먼저 상각 처리된 것이다. 반면 크레디트스위스 주주들은 22.48주당 UBS 주식 1주를 받는다. 시가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휴지가 되는 것은 면했고, 향후 USB 주가가 오를 경우 손실을 만회할 기회가 있다. 그런데 통상 변제 우선순위에서 주주보다 앞서는 채권 투자자들이 이번엔 반대로 먼저 전액 손실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상식을 뒤엎는 사태는 국내에서도 투자자들의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투자심리가 악화돼 자본성 증권의 신규 발행이나 차환이 어려워진 것이다. 임형석 한국금융연구원 은행연구실장은 “크레디트스위스 사태는 발행 조건에 상각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있었고, 스위스는 주주와 채권자 손실 분담(Bail-In)이 허용되는 국가지만 한국은 구제금융(Bail-Out) 방식 중심이라 국내에서도 동일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도 “그러나 시장 심리에 충격이 전해져 자금조달이 어려워진 게 부담”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국내에서도 신종자본증권 등 자본성증권의 발행 규모는 급격히 성장했다. 2017년까지만 해도 연간 1조원대 규모였던 국내 금융지주사와 은행의 신종자본증권 발행 규모는 5년만인 지난해 7조원을 넘어섰다. 국내 금융사들의 신용도가 높은데다 같은 은행의 예금금리보다 1%포인트 이상 높은 금리를 제공한 덕분에 한 때 없어서 못 판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수요도 몰렸다. 그러나 크레디트스위스 사태가 터진 이후 투자 심리는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우려가 커지자 국내 금융지주사들과 은행들은 앞 다퉈 자본성증권인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콜옵션 행사) 방침을 발표했다. 이들은 당분간 신종자본증권을 다시 발행하지 않아도 건전성과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금융권 내부에선 투자 심리 악화가 장기화되면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연초에 자금조달이 진행된 덕분에 당장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신종자본증권이 투자자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면, 대안 마련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교적 자금에 여유가 있는 은행권과 달리 비은행권은 타격이 더욱 심각하다. 지난해 11월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이행 사태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 바 있는 보험사들은 올 들어 한숨 돌리던 차에 유탄을 맞았다. 실제로 지난달 1300억원 규모로 자본성증권인 후순위채를 발행한 ABL생명은 수요예측에서 한 건의 주문도 들어오지 않는 미매각 사태를 경험한 바 있다. 자본 확충이 시급했던 ABL생명은 발행 금리를 희망금리 최상단인 6.6%까지 높이면서 당시 채권 발행 대표 주관사를 맡았던 한국투자증권 등에서 해당 물량을 전액 인수해 자금 조달을 마무리했다.

투자심리가 얼어붙자 최대주주가 나선 곳도 있다. 이달 말 1000억원규모의 자금 조달에 나선 푸본현대생명은 상각 조건이 없는 후순위채 발행임에도 불구하고, 최대주주가 유상증자를 결정한 것이다. 푸본현대생명의 최대주주인 대만 푸본생명과 푸본금융지주는 지난달 30일 3925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최대주주가 먼저 나서 자금을 수혈해 투자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겠다는 포석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험사들은 올해 자금 마련에 비상등이 켜졌다. 신규 자금 수요는 차치하더라도, 과거 보험사들이 발행했던 자본성증권 조기 상환 시기가 도래한 것만 4조원대 규모다. 당장 이달 만해도 한화생명(10억 달러), 5월과 6월에는 각각 KDB생명(2억 달러), 신한라이프(2000억원) 등이 자본성증권 조기 상환 시기를 맞이한다. 조기상환 미이행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국내에선 조기 상환 미이행이 곧장 시장에 충격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위지원 한국신용평가 금융1실장은   “흥국생명 사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른 바 있고, 관계당국에서 지속적으로 모니터링과 관련 조치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라 부실 금융기관이 발생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다만 국내에선 신종자본증권이 상각될 수 있는 채권이란 점을 감안하지 않고, 단순히 저금리 시대에 금리가 높은 안전한 채권으로 여겨 인기를 끌었던 측면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위 실장은 “약간의 불협화음에도 이미 위축된 시장 심리가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게 남아 있는 불안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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