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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방첩 능력 오판한 CIA, 마오쩌둥 체제 붕괴 작전 실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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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호 27면

[제3전선 정보전쟁] 냉전초기 ‘다우니 사건’ 재조명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위치한 CIA본부 전경. [중앙포토]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위치한 CIA본부 전경. [중앙포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 29일 서울 김포공항. 중천에 뜬 보름달의 배웅을 받으며 미군 수송기 C-47가 무거운 긴장감 속에 이륙했다. 행선지는 중국 만주의 지린성 안투현 쑹장진. 탑승자는 미 중앙정보국(CIA)요원인  다우니(J.Downey)와 픽토우(R. Fecteau)였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는 CIA의 중국 현지인 요원을 서울을 거쳐 사이판의 CIA훈련기지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서 다우니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현지인 요원이 아니라 중국 인민해방군의 강력한 총격과 포화였다. 정보를 미리 파악한 중국 인민해방군이 현장에 대기해 있다 집중 총격을 가한 것이다. 조종사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요원 다우니와 픽토우는 바로 체포되었다. 각각 23세와 25세로 CIA에 입사한지 갓 1년을 넘긴 다우니와 픽토우는 세간의 무관심 속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를 이겨내며 중국 감옥에서 20여년간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각각 1971년과 1973년 석방된 건 닉슨 대통령의 핑퐁 외교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훈풍이 분 다음이었다.  두 사람 어머니의 눈물겨운 호소도 석방의 한 요인이 되었다.  다우니는 석방후 뒤늦게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코넷티컷주 대법원 판사를 지냈다.

다우니, 20년 넘게 중국서 감옥 생활

다우니가 1973년 3월 12일 석방되어 홍콩으로 들어오는 모습(가운데). [사진 slate Magazine]

다우니가 1973년 3월 12일 석방되어 홍콩으로 들어오는 모습(가운데). [사진 slate Magazine]

실패로 끝나고 만 이 사건의 뒤에는 비밀 정보활동을 통해 마오쩌둥(毛澤東)을 대신할 새로운 중국지도자를 내세운다는 CIA의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미국 조야는 국공내전에서 장제스(蔣介石)을 물리치고 중국대륙을 장악한 마오쩌둥이 소련 공산당을 닮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같은 우려는, 앞으로 중국을 이끌 지도자는 마오와 같은 급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제3의 새로운 지도자이어야 한다는 공감대로 이어졌다. 이에 트루만 대통령은 중국 공산세력의 팽창을 막는 봉쇄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비밀리에 마오쩌둥 체제를 전복시키겠다는 CIA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 즈음 마오쩌둥은 서방과의 교류를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소위 ‘죽의 장막’이 시작된 것이다. 죽의 장막으로 중국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진 미국은 비밀활동 이외에 달리 선택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에 따라 CIA를 통한 마오쩌둥 붕괴 시나리오는 탄력을 받게 되었다.

CIA는 대항세력 육성을 위한 전략거점으로 홍콩을 선택했다. 마오쩌둥을 피해 홍콩에 온 중국 본토인이 100만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요원을 뽑아 중국 본토에 은밀히 침투시킨 후 마오쩌둥을 몰아낸다고 구상한 CIA는 낙하산 침투 등의 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할 훈련기지를 사이판과 오키나와에 설치하였다. 또한 침투작전을 총괄할 지도자로 장파쿠이(張發奎) 전(前) 중화민국 육군총사령관을 영입했다. 그는 국공내전기간 모택동과 싸운 경험이 풍부해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외형상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방첩 능력을 간과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사실 마오쩌둥은 공산혁명 과정에서 반혁명 분자 색출을 위해 이미 각 마을, 각 조직마다 촘촘한 감시망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허위정보를 흘려 상대를 혼란시키는 등 정보활용 능력도 뛰어났다. 어느날 중국 당국의 방첩망에 외국과 계속 무선교신을 하는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잡고 보니 CIA 훈련기지와 교신하고 있던 중국인 스파이였다.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우니 일행이 군용기를 타고 만주에 온다는 정보를 파악했다. 중국 방첩당국은 그를 회유하여 ‘만주 현지상황은 아무 이상 없다’는 허위 역정보를 다우니 일행에게 계속 타전했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만주에 들어온 다우니 일행은 완벽하게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2013년 11월 CIA로부터 정보훈장(Distinguished Intelligence Cross)을 받은 다우니(왼쪽)와 픽토우(오른쪽). [사진 slate Magazine]

2013년 11월 CIA로부터 정보훈장(Distinguished Intelligence Cross)을 받은 다우니(왼쪽)와 픽토우(오른쪽). [사진 slate Magazine]

치밀하지 못한 비밀작전 결과는 다우니와 픽토우의 희생에만 그치지 않았다. CIA는 6·25전쟁 당시 마오쩌둥 타도를 위해 중국 본토에 212명의 요원을 투입했는데 111명이 체포되고 101명이 희생당했다. 212명 모두 비밀작전에 실패했다는 의미이다. 서부의 티벳인들에게도 게릴라 교육을 시켜 마오쩌둥 타도 작전에 가담시켰으나 역시 전원 체포되었다. 특히 CIA의 비밀공작 발각은 마오쩌둥에게 중국을 더욱 철저하게 감시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그 결과 CIA공작이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CIA 휘장. [사진 slate Magazine]

CIA 휘장. [사진 slate Magazine]

이처럼 다우니사건은 지피지기해야 백전불패라는 평범한 교훈과 함께 상대국의 방첩능력 파악은 비밀공작의 필수라는 기본원칙을 일깨워 주고 있다. 16세기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기독교를 통해 중국의 변화를 시도한 이래 서구는 종교·군사·경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중국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와 합리적 판단에 기초하지 않고 단순히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나 이념적 반감으로 중국문제에 접근하다가는 실패하기 쉽상이라는 것이 이 사건의 교훈이다. 물론 이 사건 하나만으로 당시 미·중의 정보전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당시 CIA의 작전은 다소 허술한 반면, 중국의 방첩은 치밀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다우니 사건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의 아픈 기억을 통해 오늘날 정보활동의 교훈을 밝혀주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10년 간 대미 정보활동 1300% 늘려

국가안보법

국가안보법

다우니 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난 지금, 미·중 정보전은 신(新) 냉전 시대를 맞아 제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제2라운드는 당시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확전을 예고하고 있다. 첫째, 양국의 정보전 확전은 구조적으로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 정보전은 육지와 바다 하늘은 물론 가상의 사이버 공간으로 확대되는 등 무한경쟁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외 개방경제 수용으로 더 이상 죽의 장막을 칠 수 없게 된 중국은 미국의 정보전에 그대로 노출되어 확전을 피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둘째, 미·중은 뼛속까지 정보마인드로 무장된 나라들이다. 중국은 손자병법을 통해 인류역사상 최초로 간첩활용법(用間)을 제도화할 만큼 정보적 마인드가 뛰어나다. 미국도 만만치 않다. 18세기 영국과 독립전쟁 당시 열세한 국력을 정보로 극복하면서 정보마인드가 몸에 배어 있다. 미국인들 사이에는 정보가 없었으면 독립도 건국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셋째, 양국은 정보전 확전에 대한 의지도 숨기지 않고 있다. 중국부터 보자. 중국은 2010∼2020년간 대미(對美) 정보활동을 1300% (130%가 아니다!) 증가시키는 등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2020년 미국 FBI국장). 이에 미국도 2021년 CIA역사상 최초로 중국정보만 전담할 중국미션센터를 창설하는 등 제2라운드 정보전을 대비하고 있다. 넷째, 정보전을 수행할 뒷받침도 탄탄하다. 국공내전 과정에서 탄생한 중국의 국가안전부는 어느 정보기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계적 정보기관으로 성장하였다. 미국은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을 통해 CIA는 “미국 정부의 개입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다른 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대범하게 법으로 보장해 주고 있다. 이래저래 정보전 확전은 피하기 어려운 구도로 가고 있다.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오판에 의한 충돌을 예방하는 순기능이 있기 때문에 정보전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향후 양국간 정보전은 패권경쟁의 일환으로 전개될 것이므로 더욱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띨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미·중은 우리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국가이다. 다우니 사건에서 본 것처럼 지정학상 우리는 미·중 정보전의 중간거점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않든 양국 정보전에 휘말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양국간 정보전이 우리에게는 흥미의 대상이 아니라 주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은 『조선책략』에서 구한말의 조선이 국제정보에 어두워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표류하는 딱한 신세를 보고 ‘지붕에 불난 줄도 모르고 처마 밑에서 재잘거리는 참새와 제비같다’고 꼬집은 적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정보에 소홀하여 국난을 겪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최성규 고려대 법학연구원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하였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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