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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연맹 “승부조작범 사면 반대”에도…‘정몽규호’ 밀어붙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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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축구협회 ‘꼼수 사면’ 전말 

정몽규 축구협회장이 지난달 31일 열린 이사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사흘 전 의결한 징계 축구인 사면 결정을 취소했다. [뉴스1]

정몽규 축구협회장이 지난달 31일 열린 이사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사흘 전 의결한 징계 축구인 사면 결정을 취소했다. [뉴스1]

대한축구협회(회장 정몽규)의 비리 축구인 사면 파동이 점입가경·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철옹성 같던 축구협회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축구협회는 2011년 프로축구 K리그 승부조작 연루자 48명을 포함해 징계 중인 100명을 사면하기로 이사회에서 의결했으나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이를 철회했다. 이후 상황은 축구협회 임원진이 전원 사퇴하는 쪽으로 급류를 탔다. 사면을 주도한 정몽규 회장은 고립무원 상태가 됐다. 사태의 전말과 앞으로의 전망을 짚어본다.

“협회, 월드컵 스타 병풍으로 활용”

대한축구협회 이사회 자료에 따르면 협회는 올해 2월 7일에 사면 검토 실무위원회를 구성했다. 2월 9일에는 프로축구연맹 미팅 등 의견 청취를 했다. 이 자리에서 조연상 프로연맹 사무총장은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 연루자 사면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조 총장은 “폭력이나 다른 징계사유 해당자는 모르겠지만 승부조작 연루자까지 풀어주는 건 곤란하다”고 말했다고 기자에게 밝혔다.

그런데도 프로연맹의 상위 단체인 축구협회는 사면 검토 실무위원회와 공정위원회 회의를 거친 뒤 3월 22일 사면 대상자를 확정했다. 이사회는 우루과이와의 A매치 직전인 3월 28일 오후 5시30분에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이사회 일주일 전에 회의 참석자에게 보낸 자료에는 ‘징계 사면 건의(안)’이라는 제목만 명시했다. 100명의 명단은 배포하지 않고 당일 회의장의 컴퓨터 화면에만 띄워놓았다고 한다. 회의에 참석한 이사들이 명단을 제대로 훑어볼 시간도 없이 속전속결로 사면 건을 처리한 것이다. 유일하게 조연상 총장만 반대했다. “승부조작으로 징계를 받은 선수를 사면하면 시장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그들에 한해서는 무관용 원칙이 유지되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동의하는 참석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협회 공정위원장이 “프로연맹에서 그런 입장을 내지만 협회 규정상 사면의 권한은 회장에게 있다”며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점만 강조했다고 조 총장은 밝혔다.

이사회 결과는 우루과이전 킥오프 1시간 전에 기자들에게 보도자료 형태로 배포됐다. A매치 1시간 전은 축구담당 기자들이 ‘전투모드’에 돌입하는 시간이다. 출전선수 명단이 발표되면서 초를 다투는 기사 작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축구협회가 K리그의 근간을 뒤흔든 승부조작 주범들의 사면을, K리그를 주관하는 프로연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고, 이사회는 거수기 노릇만 한 가운데 사면안을 통과시켰으며, 축구기자들이 가장 바쁜 시간에 슬그머니 발표한 것이다.

승부조작범 48명 외 52명의 명단도 공개됐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실이 입수한 명단에 따르면 금전 비리, 선수·심판에 대한 폭력, 실기테스트 부정행위 등으로 제명 처분을 받은 17명이 포함됐으며, 징계 기간이 1년도 안 되는 8명에 대해서도 사면이 적용됐다. 하 의원은 “유사 사례의 재발 방지 등 징계의 목적과 효과를 채 확인할 시간도 없이, 축구협회가 무차별적인 사면을 단행한 것”이라며 “이번 ‘기습 사면 사태’를 통해 축구협회가 얼마나 폐쇄적인 환경에서 방만한 운영을 해 왔는지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축구협회의 ‘꼼수 사면’은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언론 매체가 일제히 사면의 부당성과 문제점을 지적했다. K리그 경기장에는 축구팬들이 ‘승부조작범 사면 취소’와 ‘축구협회의 각성’을 주장하는 걸개를 내걸었다.

당황한 축구협회는 사흘 뒤인 3월 31일 다시 이사회를 열고 사면 철회를 결정했다. 정 회장은 사과문을 읽었으나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은 채 퇴장해 또다시 불통 논란에 불을 지폈다.

정 회장, 아시안컵 유치 실패로 미운털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여론이 극도로 악화하자 ‘정몽규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국가대표 출신인 이영표·이동국 부회장과 조원희 사회공헌위원장이 4월 3일 사퇴를 발표했다. 4월 5일 축구협회는 “부회장단과 이사진(사무총장·전무이사·분과위원장 포함)이 일괄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축구협회 정관에 따라 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면 수용 여부에 상관없이 사임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축구협회는 회장만 남기고 임원단이 공중분해됐다.

축구계에서는 ‘예견된 참사’라는 반응이 나온다. 2013년 52대 축구협회장에 당선된 정 회장은 3선을 하면서 11년째 한국축구 수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주요 보직을 측근들로 채웠고, 2002 월드컵 멤버를 비롯한 스타 출신들을 자신의 병풍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축구협회 임원 출신인 A씨는 “협회에 바른소리·쓴소리를 할 사람이 사라졌다. 임원진에 젊은 피를 수혈하는 건 좋지만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냉철하게 회장을 보좌하고 한국 축구의 방향을 모색할 전문가를 중용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가(家)의 장기집권이 한국 축구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정몽준(1993~2008)-조중연(2009~12)-정몽규(2013~)로 이어지는 범(凡)현대 패밀리가 31년째 협회를 이끌고 있다. 축구인 B씨는 “현대가 너무 오랫동안 독주하다 보니 협회 내 다양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인재 풀도 좁아졌다. 더 큰 문제는 삼성·LG·SK 같은 다른 대기업들이 스폰서나 공익사업 등으로 한국축구에 기여할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회장의 임기는 2025년 1월까지다. 1년8개월이 남았지만 리더십에 너무 큰 상처가 났다. 축구협회 상급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의 시선도 곱지 않다. 문체부 고위 관계자는 “현대 집안 장기집권의 폐해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축구의 체질을 바꿔놓을 때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아시안컵 유치 실패로 인해 정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미운털이 박혔다. 지난 연말 카타르 월드컵 16강을 축하하는 만찬에 정 회장은 초대받지 못했다. 대통령은 두 차례나 ‘월드컵 16강 배당금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잖아도 현대산업개발 오너인 정 회장은 아이파크 아파트 공사장 붕괴 사고로 코너에 몰려 있다.

수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날지, 새 집행부를 구성해 임기를 마칠지는 정몽규 회장의 결정에 달려 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이번 사태를 한국 축구의 묵은 때를 벗기고 체질을 혁신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대표팀 92년생 손흥민파-96년생 김민재파 갈등설…“FC코리아 정규직으로 여겨”

지난달 2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에서 1-2로 패한 뒤 손흥민(7번)과 김민재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쪽은 92년생 손흥민과 동갑인 황의조. [뉴시스]

지난달 2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에서 1-2로 패한 뒤 손흥민(7번)과 김민재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쪽은 92년생 손흥민과 동갑인 황의조. [뉴시스]

대한축구협회가 임원진 총사퇴로 크게 흔들리는 가운데 대표팀에서도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이른바 1992년파와 1996년파의 갈등설이다.

지난 3월 기준 대표팀 내 92년생은 손흥민(토트넘)을 중심으로 황의조(서울), 이재성(마인츠), 김진수(전북), 손준호(산둥), 권경원(감바 오사카) 등 6명이다. 96년생은 김민재(나폴리)를 비롯해 황인범(올림피아코스), 나상호(서울), 조유민(대전) 등 4명이다. 대표팀은 이 두 그룹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다.

갈등이 수면 밖으로 드러난 것은 3월 28일 우루과이와의 평가전. 한국은 1-1로 맞선 후반 16분, 김민재의 파울로 프리킥을 허용했고, 이것이 골로 연결돼 1-2로 졌다. 경기 후 라커룸에서 92년생 중심으로 선배들이 김민재에게 수비의 문제점을 질책했다고 한다. 그 직후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김민재는 “좀 힘들고 멘탈적으로도 무너져 있는 상태다. 대표팀보다는 소속팀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해 난데없는 ‘대표팀 은퇴설’이 불거졌다. 김민재가 손흥민과 맺었던 SNS 팔로우를 잠시 끊는 바람에 둘의 불화설이 증폭됐다. 김민재는 이후 ‘대표팀 내 96년생 라인들이 파벌을 만들고 있다는 말은 정말 당황스러운 이야기’라며 ‘모든 이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묘한 기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축구 전문가들은 “벤투 감독 시절 4년간 거의 똑같은 멤버를 뽑는 바람에 비슷한 연배끼리 똘똘 뭉치게 됐고, 자신들을 ‘FC코리아 정규직’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런 갈등을 중재해 줄 ‘선배’가 없다는 점이다. 클린스만 감독이 지휘하는 대표팀에는 한국인 코치가 한 명도 없다. 팀 내에서 개인의 고민을 상담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멘탈 코치’가 축구 대표팀에 꼭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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