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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문턱 낮춘 서민 ‘동아줄’…1회용 아닌 지속적 대책 필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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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호 06면

취약계층 소액생계비 대출 ‘슬픈 흥행’

소액생계비 대출 출시 첫 날인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중앙 서민금융종합지원센터에서 시민들이 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뉴시스]

소액생계비 대출 출시 첫 날인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중앙 서민금융종합지원센터에서 시민들이 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뉴시스]

“더 이상 손 벌릴 곳이 없죠. 며칠째 일감도 없는데, 50만원이라도 못받았으면 아찔합니다.”

4일 오전 서울 중구 중앙 서민금융종합지원센터에서 소액생계비 대출을 신청하고 나오던 40대 김모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현재 신용회복 중으로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기 어렵고,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인테리어 일을 하고 있는데 최근 일감이 줄면서 생활고가 극심해졌다. 급한 마음에 아내가 대출을 알아보다 “투자금을 20배로 불려주겠다”는 금융 사기에 걸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태다. 김씨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지만 초등학생인 딸도 있으니 힘을 내보겠다”며 “대출 상담을 받으면서 복지연계 서비스도 신청했다”고 했다.

독거노인인 60대 후반의 김씨는 “돈도 없고 몸도 아파 극단적 선택도 여러번 시도했다”며 “걸어다니면 쎅쎽 소리가 날 만큼 호흡이 가쁜데, 대출 받은 돈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치료를 시작해보려 한다”고 했다.

50만원의 동아줄일까. 1회용 미봉책에 그칠까. 지난달 27일 시작된 소액생계비 대출이 취약계층에 호응을 얻으며 연일 ‘서글픈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대면 상담을 위한 온라인 예약 신청은 매주 ‘오픈런’을 방불케한다. 지난 5일, 5월 첫 주까지의 상담 예약을 받았는데 서울 지역은 30분도 채 안돼 접수가 마감됐다. 전국 전 지역도 1시간30분 만에 예약이 꽉 찼다. 현재 상담 예약 신청자 수(누적)는 3만8000여 명에 이른다.

연체자·다중채무자도 상담 당일 대출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매주 수요일~금요일에 앞으로 4주 후까지의 상담 예약을 받고 있는데, 수요일 오전이면 접수 예약이 모두 끝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소액생계비 대출은 급전이 필요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최대 100만원까지 연 15.9%로 빌려주는 서민정책금융이다. 기본 50만원에 불과한 소액을 고금리로 빌리기 위해 극심한 예약 전쟁을 치를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방증이다.

금융위는 지난달 27일 상품 출시 배경으로 “소액생계비 대출은 최근의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불법사금융에 노출되기 쉬운 소액자금이 필요한 분들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하는 제도”라고 밝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정부가 저신용자 대상 소액생계비 대출 상품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감하게 대출의 문턱을 낮춰 ‘신용평점 하위 20% 이하이면서 연소득 3500만원 이하’인 사람에게 대출해준다. 연체가 있어도, 다중채무자여도 대출이 가능하다. 상담 당일 대출을 해준다는 점도 특징이다. 출시 첫 주(지난달 27일부터 31일)에는 예약 6250명 중 5499명이 전국 46개 센터를 찾아 상담을 받았다. 이중 저신용·저소득 요건에 맞지 않거나 조세체납자, 금융질서 문란자 등 일부를 제외한 5457명이 당일 대출을 받았다.

소액생계비 대출은 과연 벼랑 끝에 내몰린 취약계층에 대한 동아줄이 될 수 있을까. 정부가 어려운 시기에 취약계층을 위한 새로운 대출 통로를 열어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제도권에서 밀려난 대출자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성태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 악화로 많은 국민들의 삶이 어렵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소액생계비 대출 등과 같은 정책 상품과 재정적 지원을 확대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부터 금리가 급등하면서 취약계층은 더욱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은행들이 최근 상생 경영을 내세워 대출 금리 인하에 나섰지만 이들에게는 먼 세상의 얘기다. 지난달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신용대출을 받은 차주의 평균 신용점수는 918.8점(KCB)다. 관련 공시가 시작된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 중이다. 건전성 강화를 명분으로 대출 문턱을 더욱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제도권 금융의 마지노선으로 꼽히는 대부업권까지 문을 걸어닫고 있다. 기준금리 급등으로 조달비용과 연체·부도율이 상승압력을 받는데 비해, 법정 최고금리는 20%에 묶여있어 손실이 우려되서다. 최승재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정식 등록된 대부업체 상위 69곳의 올 1월 신규대출 금액은 428억원으로 전년 동월(3846억원)의 10분 1 수준이다. 서지용 상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기준금리가 올라가면 그만큼 법정 최고금리도 올려 제2·3금융권이 저신용자에게 대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신 불법 사금융이 활개를 치고 있다. 금융감독원 불법사금융신고센터 피해신고 접수건수는 2019년 4986건에서 2022년 1만350건으로 두 배 넘게 폭증했다. 이들 대부금융협회 추정 불법사금융 평균 금리는 무려 414%의 살인적인 수준이다. 서민들의 이자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낮춘 법정 최고금리가 금리 인상기를 맞아 오히려 서민들의 대출 기회 자체를 박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지난 2021년 법정 최고금리가 연 24%에서 20%로 인하된 후 최대 3만8천명이 대부업 시장에서도 밀려나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렸다고 진단했다.

대출 절벽에 몰린 서민들에게 소액생계비 대출은 일종의 ‘동아줄’이다. 처음에는 50만원을 빌려준 뒤 6개월 이상 이자를 성실납부하면 50만원을 더 빌려준다. 의료비·교육비 등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증빙하면 최초 상담에서도 최대 100만원까지 빌릴 수 있다. 출시 후 일주일간 대출을 받은 사람 중 3874명은 50만원을 빌렸고, 병원비 등 자금용처가 증빙된 1625명은 100만원을 대출 받았다. 이 기간 1인당 평균 대출 금액은 64만원 수준이었다. 서지용 교수는 “15.9% 금리에도 소액 대출 신청이 봇물을 이룬다는 것은 그만큼 제도권 금융에서 지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으로, 중장기적으로 지원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 상담·후 대출 관리 적극 검토해야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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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캐피탈이냐. 50만원, 100만원이 없어서 대출 받는데 이자가 15.9%라는 건 서민 살리는 정책이 아니라 서민 죽이는 정책이지.” “지금 죽지 못해 사는 사람 넘쳐난다. 1회용 대책이 아니라 지속적 대책을 내놔라.”

긍정적 취지에도 불구하고 생계비 대출을 놓고 논란도 커지고 있다. 반론이 나오는 가장 큰 부분은 연 15.9%의 고금리다. 온라인 금융교육을 이수하고 이자를 성실히 갚으면 연 9.4%까지 낮춰준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취약계층 지원책으로는 지나치다는 것이다. 정부가 제도권에서 밀려난 취약계층을 상대로 고리대금 사업을 벌이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경기도에서 2020년부터 3년간 운영한 도내 저신용 취약계층들을 대상으로 한 ‘경기 극저신용대출’은 연 1%로 최대 300만원을 5년간 빌려주는 조건이었다. 이 대출 사업의 수행기관인 주빌리은행의 유순덕 상임이사는 “최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대출은 금융이 아닌, 복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도가 너무 적다는 의견도 많다. 건설 일용직을 하고 있다는 40대 이씨는 “지게 차 일을 배우고 싶은데, 빚을 계속 갚아야 해서 일을 중단하고 교육을 받으러 갈 수 없다”며 “50만원으로는 상황 개선이 어렵다”고 했다. 금융권 안팎에서도 회의론이 흘러나온다. 민복기 한국재무연구소장(한국금융연수원 외래교수)는 “소액대출이라고 해도 코로나 시기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한 지원금보다 적은 액수로 책정했는지가 의문”이라며 “궁핍한 계층을 대상으로 50만원의 대출은 매우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책”이라며 비판했다.

지속가능성도 의문이다. 대출의 재원은 은행권 및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의 기부금으로 마련된 총 1000억원이다. 50만원씩 빌려줄 경우 20만 명이 대출을 받을 수 있지만, 하루 6억원가량이 소진되는 추세를 고려하면 올해 재원 1000억원은 이르면 오는 7월 무렵 바닥이 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1회성 대출보다는 종합적인 복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 전 원장은 “이번 소액생계비 대출의 대상은 사실상 돈을 갚기 어려운 계층으로, 만기 1년 후 갚아야할 시기가 되면 연체 기록으로 더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대출 지원 방식에 우려했다. 인천가계부채센터장인 서경준 돈병원 원장은 “취약계층에 대한 취업 및 복지 지원, 채무조정 방안 등과 더불어 일부의 대출이 더한 방식이 필요한데, 대출 정책이 부각되며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 이사는 “취약계층은 다중채무에 묶인 경우가 많아 생계비 대출을 받아도 실제 다른 빚을 갚는데 이 돈이 쓰일 우려가 크다”며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막으려면, 생계 자금이 다른 대출금 상환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기존 채무를 정리하고 통장 압류 등을 풀어주는 등 선(先)상담, 후(後)대출의 관리가 적극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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