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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일본의 집단 망각과 반도체 부활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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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에디터

김동호 경제에디터

일본이 달라지고 있다. 저무는 태양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한국 일각에선 일본의 무기력을 가리켜 ‘잃어버린 40년’이라고 단순화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정신차려야 한다. 일본이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최근 일본은 오랜 침체를 떨치고 특유의 저력을 발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변화는 전격적인 반도체 영토 회복 시도다. 일본은 홋카이도와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나섰다. 추진 속도와 방식, 목표가 모두 놀랍다. 구마모토에 들어서는 대만 TSMC 공장은 심야에 불을 밝혀 24시간 공사 중이다. 자존심은 완전히 갖다 버렸다. 일본은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다. 당시 일본의 기업 가치는 세계 시가총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었다. 그만큼 일본의 저력은 강했다. 우호 관계가 각별했던 대만엔 반도체 기술을 많이 전수해 줬다.

체면 내려놓고 대만·미국 기술 도입
선택적 지각으로 과거사엔 눈 감아
흥분 말고 일본의 변화 들여다봐야

이제는 체면 다 내려놓고 대만에서 반도체 생산기술을 역수입하고 있다. 대만은 이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중국의 위협에 대한 헤지 차원이다. 일본은 중국 견제에 나선 미국의 ‘칩4’ 동맹과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신속하게 참여했다.

미·중 대립은 잠들어 있던 일본의 반도체 부활 꿈을 꾸게 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의 지각변동이 일본의 ‘가미카제(神風)’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일본의 간판 기업들이 참여해 홋카이도에 공장을 짓기로 한 라피더스는 한때 반도체 최고 강자였던 IBM의 지원을 받는다. 메모리 반도체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주도하고 있어 일본의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챗GPT 같은 분야에서 수요가 폭발하는 로직반도체·이미지센서 등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는 일본에 새로운 기회다. 라피더스는 단박에 2나노미터(nm, 10억분의 1m) 미세공정에 도전한다.

또 대만의 기술을 도입하는 TSMC 구마모토 공장에는 12nm 및 16nm, 그리고 22nm 및 28nm 반도체 라인 등 총 2개의 라인이 구축된다. 이 공장은 최근 수요가 늘어나는 12인치 웨이퍼를 월 5만5000장 생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수요가 급증하는 이미지센서와 차량용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등을 생산할 예정이다.

라피더스는 홈페이지에 “설계, 웨이퍼 공정, 3D 패키징까지 세계 최고의 공정 단축 서비스를 개발해 고객에게 제공한다”고 경영 방침을 밝히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선 삼성전자에 밀려났지만 시스템반도체만큼은 일본의 저력을 발휘하겠다는 다짐이 읽힌다. 일본은 개발력·기술력·제조력을 아우른 ‘모노즈쿠리’의 전통이 있다.

한국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을 발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앞날이 순탄할지는 미지수다. 삼성전자는 공장 진입도로 개설에 수년을 허비했고, SK하이닉스는 120조원 투자 발표 이후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초당적 지원 아래 지방자치단체가 전담 부서까지 만들어 밤새워 공장을 짓는 일본의 약진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변화를 가볍게 여기는 풍조다. 과거 임진왜란, 한일합병 직전에도 조선은 일본 정세를 직시하지 않았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쓰도록 했다. 강제징용도 ‘참가’라고 본질을 호도했다. 일본 전후 세대가 집단 망각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100년 전 관동대지진 당시 최소 6600명에 이르는 조선인 학살 사건에도 모르쇠다. 그러면서 원폭에 대해선 거듭 국제사회에 피해를 호소한다. 역사에 눈 감고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 선택적 지각이다.

이런 일본과 이웃해 살기 위해서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메모리·비메모리 모두 반도체 초격차 기술을 지키고, 눈 크게 뜨고 일본의 움직임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과거사에 눈 감은 일본에 다시 당하지 않는 길이다. 죽창가만 외치는 반일(反日) 선동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