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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전기요금 동결의 디스토피아

중앙일보

입력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는 대체로 자연법칙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훗날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선택하면 기회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공짜 점심’은 없다. 지난달 31일 정부·여당은 당초 예정됐던 올해 2분기 전기·가스요금 인상을 보류했다. 그날 증시에서 한국전력 주가는 4.7% 하락했다. NH투자증권은 한전 목표주가를 3만원에서 2만2000원으로 27%나 하향 조정했다.

 가스공사는 그나마 미수금 계정에 손실을 쌓아둘 수 있지만 한전은 훨씬 심각하다. 지난해 한전은 ㎾h당 153.7원에 전력을 도매로 사들여 구입단가의 78.4%인 120.5원에 팔았다, 역마진이어서 많이 팔수록 적자가 커진다. 결국 지난해 33조원에 육박하는 영업적자를 냈다. 한전의 적자는 채권시장과 외환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전기요금 동결이 가져올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예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한전채 발행 늘면 금융시장 더 불안
통화정책 효과 줄고 외환시장 흔들
여당, 집토끼 잡으려면 원칙 지켜야

 우선 금융시장 불안. 전력 장사로 버는 돈줄이 막히자 한전은 지난해 43조원을 외부에서 조달했다. 대부분(37조원)이 한전채였다. 지난해 발행된 국내 채권 물량의 4.8%, 회사채 발행량의 거의 절반(45.6%)을 차지했다. 중소·중견기업이 융통할 시중자금을 한전이 빨아들인 셈이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로 자금시장이 얼어붙은 데엔 한전채의 과도한 발행도 한몫했다.

 전기요금 동결은 한전채 폭탄이 떨어진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던질 것이다. 3개월, 6개월 뒤를 내다보는 채권 투자자들은 채권값 하락 걱정에 보유 물량을 팔아치우고 이는 시중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지난 2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금리를 1년 만에 동결했다. 이창용 총재는 ‘안갯속 운전’에 비유해 귀에 착 감기는 설명을 했다. “안개가 자욱할 때는 잠시 차에서 내려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한은이 애써 기준금리를 동결했는데 시중금리가 오르면 통화정책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둘째, 외환시장 불안. 수출은 6개월 연속 마이너스, 무역수지는 13개월째 적자다. 경상수지마저 적자가 이어지면 외환시장이 흔들릴 수 있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올라 물가에도 도움이 안 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전기요금 인상 요인 51.6원/㎾h을 반영하면 전력 소비가 15.2% 줄고 에너지 수입 감소로 무역적자가 124억 달러(지난해 연간 무역적자의 26%) 줄어든다.

셋째, 원전 수출에도 부정적이다. 수출 길을 터야 원전 생태계 복원이라는 윤석열 정부의 공약도 지킬 수 있다. 지난해 한전의 부채비율은 459%, 재무상태가 나쁘면 수주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 밖에도 거론할 게 너무 많다. 한전 지분의 33%를 쥐고 있는 산업은행 손실로 이어지자 정부가 최근 석 달 새 산은에 1조원을 긴급 투입했다. 요금을 정상화하지 않으면 중장기적으로 한전의 전력망 투자가 부실해지고 전기 과소비와 에너지 비효율이라는 우리 경제의 고질도 고치기 힘들다.

 대통령의 당정 협의 강화 지시 이후 당에서 정부의 전기요금 인상에 제동을 걸었다. 매 분기 초에 분기별 전기요금을 결정해 온 관행이 깨졌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훼손됐다. 전기요금은 정치 바람을 타는 정당이 아니라 독립적인 위원회가 결정해야 할 필요성을 새삼 절감한다. 요금 인상 결정이 늦어질수록 국민 부담이 늘어난다. 한전채 잔액은 75조원, 하루 이자만 38억원이다. 국민 1인당 매달 2200원을 부담하는 셈이다.

 윤석열 정부는 전기요금 정상화를 미뤄온 지난 정부의 에너지 포퓰리즘을 비판해 왔다. 노조의 불법에 흔들리지 않고 법치를 강조하며 돌파해 온 것처럼 수익자 부담 원칙에 맞게 에너지 요금을 정상화해야 한다. 이는 원가 연동제를 무력화하고 에너지 시장의 가격 기능을 무너뜨린 지난 정부에 실망하고 정권 교체를 원했던 ‘집토끼’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글 = 서경호 논설위원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