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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장원의 부동산 노트

'깨끗한 등본'의 배신, 17억 대출 있었다…한푼 못받는 전세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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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안장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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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원의 부동산 노트] 전세사기 피해 대책 

안장원 부동산선임기자

안장원 부동산선임기자

대중교통이 편리하지는 않았다. 전철에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언덕길을 10분가량 더 가야 했다. 하지만 지은 지 몇달 되지 않은 새집이었다.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조망이 마음에 끌렸다. 7가구가 들어선 4층짜리 다세대주택에서 베란다가 널찍하고 한 가구만 들어선 꼭대기 층(전용 30㎡)을 계약했다. 전세 보증금이 저렴했다. 1억3000만원이었는데 인근에 있는 비슷한 크기가 2억원이었다.

보증금 한푼 못 받는 신탁 사기 # 공매 미수금 작년 2배로 급증 # 대책은 단속·예방·지원에 그쳐 #"사회적 재난, 구제해야" 주장도

 전세사기 피해 방지를 위한 임대인 미납국세 열람제도가 시행된 3일 서울 남대문세무서 민원실에 미납국세 열람제도 안내문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전세사기 피해 방지를 위한 임대인 미납국세 열람제도가 시행된 3일 서울 남대문세무서 민원실에 미납국세 열람제도 안내문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등기부 등본은 깨끗했다. 소유권 이외 권리 사항을 담은 '을구’에 ‘기록사항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선순위 대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소유권을 다룬 '갑구'에 건물주가 집을 지은 직후 부동산신탁회사에 신탁하며 소유권을 넘긴 것으로 나와 있었다. 4개월 이내에 신탁을 해지한다는 특약을 넣고 전세계약서를 작성했다.

3년 반 전인 2019년 9월이다. 30대 세입자 A씨는 2년 전세계약 기간이 끝난 지 한참 지난 지금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계약한 건축주는 구속됐다. 신탁회사는 전세 계약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증금 반환 책임이 없다고 했다.

신탁 세입자는 '불법 점유자'

뒤늦게 알고 보니 함정은 등기부 등본 갑구의 신탁 사항 옆에 기재된 ‘신탁원부 제2019-****호’에 숨어 있었다. A씨 전세 계약 2개월 전에 체결된 신탁계약서엔 “위탁자(건축주)는 신탁 기간에 수탁자(신탁회사)와 우선수익자(대출회사)의 사전 동의 없이 임대차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었다.

건축주는 건물이 준공한 뒤 신탁회사와 담보신탁을 맺고 금융회사에서 17억원을 대출받았다. 건물 가격(평가금액 20억원)의 80%다. 건축주는 중개업자 등과 짜고 이런 사실을 숨긴 채 전세계약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물린 보증금이 A씨를 포함해 10억원 정도다.

건축주가 대출금액을 갚지 못해 신탁회사는 집 전체를 공매에 넘길 예정이다. A씨 등은 임차권을 인정받지 못해 신탁회사에 대항력이 없기 때문에 공매에서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다. 이들은 '불법 점유자'로 조만간 쫓겨날 처지다. 주로 20~30대 젊은 층이 당하는 전세 사기도 기가 막힌데 신탁 사기는 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이 아예 없어 더욱 안타깝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나마 계약이 유효해도 세금 등에 밀려 보증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받은 공매주택 임차보증금 미회수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 규모가 185억원으로, 2021년(91억원)의 2배가 넘었다. 이중 전액 못 받은 금액이 2021년 23억원(19건)에서 지난해 54억원(37건)으로 늘었다. 세금 등을 변제하고 남는 임차인 몫이 없는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낙찰받기도

일부 피해자는 ‘셀프 경매’를 통해 자구책을 찾아 나서고 있다. 보증금을 언제, 얼마나 돌려받을지 모르는 막연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집을 떠안는 것이다. 보증금을 일부라도 회수할 수 있어서다. 보증금 2억원이고 체납세금 5000만원이 있는 집을 2억원에 낙찰받으면 낙찰가 2억원을 낸 뒤 세금을 빼고 나머지 1억5000만원을 배당받는다. 보증금에서 5000만원을 찾지 못하지만 그나마 1억5000만원은 건지는 셈이다. 경매업체인 지지옥션에 따르면 서울에서 임차인이 낙찰받은 주거시설 건수가 지난해 하반기 61건으로 상반기(44건)보다 50%가량 늘었다. 이주현 지지옥션 선임연구원은 “수기로 집계한 것이어서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며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집값이 보증금 이하로 계속 떨어질 위험을 감수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셀프 경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탁 사기 피해자는 집을 낙찰받기도 어렵다. 신탁사가 대개 건물 전체를 일괄 매각 식으로 공매에 부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개별 낙찰이나 매각을 요구하고 있다. 피해 복구가 요원한데도 정부 대책은 단속·예방·지원에 집중되는 바람에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서 전세 사기 피해에 대한 공적 구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사적 영역에서 발생한 전세 사기 피해를 부주의한 개인의 잘못으로 볼 것인지, 국가도 책임을 져야 하는지다.

피해자들은 국가의 실패에 따른 사회적 재난이라고 주장한다.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제도의 허점이 사기 발판이 되었고 정부가 관리·감독하지 않아 만들어진 사회적 재난”이라며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고 당연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소극적인 입장이다.

일부 피해 보장 등 담은 특별법 발의

공적 구제 여부는 국회에서 결론이 날 전망이다. 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해당 주택 공공매입, 보증금 일부 피해 보장 등을 담은 특별법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집값·전셋값의 급등·급락 소용돌이에서 정부는 집 있는 사람을 우선 돌봤다. 양도세·종부세 등을 완화해 다주택자를 포함한 유주택자의 세금 부담을 덜어줬고, 무리하게 집을 산 '영끌'족의 고금리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저리의 특례금융상품을 만들었다. 새집을 분양받으라며 젊은 층에 청약 문턱을 낮추고 분양가를 인하했다.

'영끌'이나 분양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젊은 층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전세 사기 피해를 보거나 위험에 방치돼 있다. 전세 사기 몸살을 앓았던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고시원 건물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니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임차권등기를 신청한 34명 중 2명을 제외한 32명이 20~30대였다. 이들은 방 하나만 갖춘 15㎡ 정도 공간에서 4000만~7000만원의 보증금을 내고 살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20~30대 8~9가구 중 한 가구가 주택이 아닌 고시원 같은 시설에서 살고 있다. 주택시장 사각지대 및 그늘에서 약한 고리에 매달려 있는 젊은 층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