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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사랑해"도 못한채 이별…10명중 8명 '벼락치기 존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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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일 때 내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전남 보성군 전샛별(34)씨의 어머니 신모(임종 당시 54세)씨는 2020년 9월 화순전남대병원에서 연명의료계획서를 쓰고 귀갓길에 이렇게 말했다. 신씨는 6년간 폐암(4기)과 힘겹게 싸워온 터였다. 그는 얼어붙은 표정의 딸에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 결정에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딸한테 온갖 보살핌을 받고 있네. 마치 내가 딸이 된 것 같다. 더 나약해지기 전에 딸 앞에서 부탁이 아닌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신씨는 가정용 호흡보조기를 달고 집에서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석 달 후 호흡이 힘들어지고 통증이 심해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신씨는 연명의료계획서대로 심폐소생술 등을 받지 않았고, 이틀 만에 눈을 감았다. 전씨는 “엄마가 연명의료를 했다면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선택대로 했다. 슬픈 와중에도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2일 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2일 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2019년 12월 29일 오전 6시 경기도 한 대학병원의 1인실에서 ‘봄날은 간다’가 울려 퍼졌다. ‘고향의 봄’이 이어졌고 김모(62·경기도 안산시)씨의 어머니(당시 89세)는 눈을 감았다. 김씨의 네 자매는 어머니가 좋아하던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전날까지 딸들의 노래와 말을 눈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씨는 “엄마가 평소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 노랫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잠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망자 16.5% 연명의료 거부하고 숨져 

생의 마지막에 연명의료를 거부하고 숨지는, 소위 존엄사를 선택한 사람이 26만여명에 달한다. 연명의료 중단이란 임종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 등 7개 행위를 중단하거나 시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한 후 지난해 말까지 25만6377명이 연명의료를 거부(유보)하고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총 사망자의 16.5%를 차지한다. 조정숙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센터장은 “중환자실에서 각종 의료기기를 주렁주렁 달고 불필요한 연명의료 행위를 받고 고통 속에서 숨지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존엄사에 대한 인식이 확산하면서 건강할 때 미리 존엄사를 서약하는 이들도 늘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157만여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했다. 이는 19세 이상 성인인구의 3.6%, 65세 이상 노인의 13.1%를 차지한다.

연명계획서 쓴 66%는 당일 이행 

하지만, 연명의료 중단을 선택한 25만6377명 중 21만2515명(약 83%)이 마지막 결정을 ‘벼락치기’로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 나누면 임종 상황에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가족이 전원 합의하거나 환자의 뜻을 추정해 연명의료를 중단한 경우가 15만7719명이다. 연명의료계획서를 활용한 사망자 5만4796명(전체 연명계획서 작성자의 66%)은 이 서류에 서명(의사와 환자가 서명)한 날에 의사가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이행서’를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 센터장은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미루다 막바지에 두 서류를 같은 날에 벼락치기로 작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건강할 때 미리 사전의향서를 작성해 두고 연명의료를 중단(유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난 5년 사전의향서를 활용한 존엄사는 5.9%이다. 지난해만 따지면 10.6%로 올랐다.

2일 서울적십자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 가족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김종호 기자.

2일 서울적십자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 가족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김종호 기자.

대장암 환자 A(61)씨는 수도권의 대형병원에서 지난해 5월까지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러다 뼈로 전이돼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다. 의료진은 10월 초 병세 악화가 예상되자 급히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 환자 서명을 받았다. A씨는 이날 저녁 숨졌다. 이 바람에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지 못했고, 가족과 이별시간을 갖지 못했다.

미리 계획서 쓰고 시간 갖는 게 ‘웰다잉’

존엄한 죽음의 중요성을 알리는 사회 운동을 하는 원혜영 전 의원(웰다잉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은 “막판에 몰려 임종기에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게 되면 ‘나의 마지막은 내가 결정한다’는 자기결정권 보호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 존엄사 제도가 5년 동안 반쪽짜리 성공만 거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원 전 의원은 “사전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미리 작성하고 통증 완화 호스피스 치료를 받으며, 사망장소를 선택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작별을 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웰다잉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허대석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임종 두세 달 전에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야 사전돌봄계획을 짤 수 있고 그래야 호스피스 이용이 늘고 임종기의 고통을 줄여 편안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데, 아직도 죽음을 실패로 간주하고 의료에 집착하는 문화가 여전하다”며 “5년 전 입법의 취지를 못 살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 전문가들은 벼락치기 결정의 이유는 존엄사의 여건이 아직 덜 성숙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허윤정 신촌 세브란스병원 완화의료센터 간호사(연명의료윤리위원회 간사)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전보다 인식이 좋아졌지만 의료진이 미리 연명의료 관련 설명을 하기에는 아직 의료 환경이 받쳐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늦어지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존엄사 인식이 개선됐다지만 여전히 벽이 높다는 뜻이다.

2일 서울적십자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 가족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김종호 기자.

2일 서울적십자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 가족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김종호 기자.

“현장서 계획서 작성 돕고 정부가 인력 지원해야”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 결코 쉽지 않다. 의사가 최소 3회 이상 상담해야 한다. 그런데 의사가 연명의료 중단을 말하는 걸 꺼리는 데다 ‘3분 진료’에 쫓긴다. 또 반대하는 가족이 많다. 허 간호사는 “임종기에 접어들어 몸이 힘든 상태에서 어려운 결정까지 내리게 돼 안타깝다. 미리 결정할 수 있게 지원하는 팀이나 인력이 늘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미영 국립암센터 공공의료사업팀 간호사는 “연명의료계획서를 미리 쓰려면 환자나 보호자에게 말기 또는 임종기라는 사실을 통보해야 하는데 의료진 입장에서 그리하기가 부담스럽다. 중소병원 의사가 연명의료 얘기를 꺼내면 환자가 ‘치료를 안 하겠다는 거냐’고 화를 낸다고 한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환자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임종이 임박해서 연명의료계획서를 쓰게 되거나 아예 이조차 못 쓰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원혜영 전 의원은 “지자체의 절반 가량이 사전의향서 등록을 받지 않는다. 정부는 웰다잉지원법을, 지자체는 조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존엄사=임종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 투여·수혈·체외생명유지술·혈압상승제 투여 등 7가지 연명의료행위를 중단(유보)하는 것을 말한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시술도 마찬가지다. 2018년 2월 합법화되면서 의사가 처벌받지 않게 됐다. 사전의료의향서, 연명의료계획서, 가족의 환자 의사 추정, 가족 전원합의 등 4개 방법으로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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