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 빼입고 타야 제맛…'신사의 나라' 장인이 만든 자전거 뭐길래 [비크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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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입니다. 고물가가 계속되면서 절약을 생활화하기 위해 하루 지출 0원에 도전하는 거죠. 출퇴근 교통비를 아끼려다 보니 자연스레 자전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요. 자전거 인프라도 좋아지고 있어요. 서울시가 총 길이 78km에 달하는 한강 자전거도로의 폭을 기존 3m에서 4m로 넓힌다고 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자전거가 있습니다. 특히, 멋진 정장을 빼입고 타야 어울리는 클래식한 감성을 가진 자전거 브랜드인데요. 신사의 나라 영국 장인이 만들어서 유명하고, 세상에서 가장 작게 접혀서 더 유명한 자전거. 바로 브롬톤(Brompton)입니다. 특유의 기능과 감성으로 전 세계적으로 팬덤까지 상당하다고 하는데요. 오늘 비크닉에서는 사람들이 브롬톤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2019년 ‘브롬톤 월드 챔피언십 코리아(Brompton World Championship Korea)’에 참여해 브롬톤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참가자들. 산바다스포츠.

지난 2019년 ‘브롬톤 월드 챔피언십 코리아(Brompton World Championship Korea)’에 참여해 브롬톤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참가자들. 산바다스포츠.

런던 교통 체증으로 생겨난 발명품

브롬톤은 1976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브랜드에요. 창업자는 케임브리지 공대에 다니던 앤드루 리치(Andrew Ritchie). 당시 영국 런던은 교통체증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런던 외곽에 살던 리치는 시내로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스트레스가 극심했다고 해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버스나 지하철에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자전거를요. 버스를 타다가 길이 막히면 내려서 바로 타는 거죠. 그러려면 간편하게 접을 수 있어야 하고, 크기도 가방처럼 작아야 했습니다.

앤드루는 수 개월간 연구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작게 접히는 자전거를 설계하죠. 자전거를 만드는 공장에 가서 제작을 의뢰했지만 모두 거절합니다. 기존 자전거를 만드는 방식과 너무 달라서였죠. 앤드루는 포기하지 않아요. 1976년 직접 회사를 차립니다. 이름은 브롬톤. 자신의 집에서 내려다보이던 브롬톤 성당(Brompton Oratory)에서 따왔습니다. 시제품을 만들고 5년간 계량을 거듭했습니다. 결국 1981년 첫 번째 모델 ‘마크 원(Mark1)’을 내놓습니다. 두 가지 단계를 수행하면 16인치 바퀴 크기로 접을 수 있었죠. 소요시간도 20초에 불과했어요.

브롬톤 창업자인 앤드루 리치와 그가 작성한 자전거 설계도. 브롬톤 공식홈페이지.

브롬톤 창업자인 앤드루 리치와 그가 작성한 자전거 설계도. 브롬톤 공식홈페이지.

혁신적이었지만 초기 시장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특이한 제품이라 자전거 소매업체가 취급해주지 않았거든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금 조달에 문제까지 생깁니다. 하지만 브롬톤의 가치를 알아본 이가 있었습니다. 하이엔드 오디오로 유명한 네임오디오(Naim Audio)의 창업자인 줄리안베레커(Julian Vereker)가 브롬톤의 열렬한 팬이었거든요. 그가 비즈니스와 자금 조달에 발 벗고 나서면서 브롬톤은 위기를 극복합니다.

결국 공대생의 오랜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보기 시작합니다. 1987년 런던에서 열린 자전거 쇼인 사이클렉스(Cyclex)에서 최고 제품상을 수상하고요.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워지며 수출량도 크게 늘었죠. 1995년엔 수출 분야 공로로 ‘여왕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듬해엔 독일 자전거단체(ADFC)가 선정하는 올해의 자전거로 선정됩니다. 자전거 기술력이 뛰어난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셈입니다.

밀리언셀러가 된 비결

작게 접힌 브롬톤의 자전거. 브롬톤코리아 인스타그램.

작게 접힌 브롬톤의 자전거. 브롬톤코리아 인스타그램.

지난해 12월 브롬톤은 누적 판매량 100만대를 달성합니다. 특히 지난해에만 전 세계에서 10만대가 팔렸다고 해요. 한대에 250만원에서 500만원까지 하는 고가제품임에도 인기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직전인 2019년만 해도 5만여대가 판매됐거든요. 몇 년 사이에 판매량이 두배 가까이 증가한 거죠. 팬데믹에 이어 친환경 트렌드 열풍에 직접적인 수혜를 입은 거로 풀이됩니다.

사실 자전거 시장에서 주류는 큰 바퀴를 가진 로드 자전거나 산악자전거(MTB)에요. 최근에는 전기자전거까지 개발되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죠. 이 틈바구니에서 접이식 미니벨로인 브롬톤이 좋은 성적을 거둔 덴 나름의 비결이 있습니다.

우선은 내구성입니다. 잔 고장이 없어 수십 년째 타는 사람이 많다고 해요.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만들려는 브롬톤만의 장신정신 덕분이에요. 지금도 영국 본사에서 전체 공정의 95%가 이뤄집니다. 자체 부품도 90%에 달한다고 해요. 실제로 장인들이 만들기도 합니다. 창업 초기 직원들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고 해요. 보통 자전거 업체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곳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부품도 외부에서 가져오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과 역행하는 거죠. 브롬톤은 오히려 자체 공정과 부품 비율을 계속해서 높여간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습니다. 품질에 대한 고집으로 어느 브랜드보다 튼튼한 자전거를 만드는 겁니다.

브롬톤의 영국 공장 모습. 이곳에서 전체 공정 95%가 이뤄진다. 산바다스포츠.

브롬톤의 영국 공장 모습. 이곳에서 전체 공정 95%가 이뤄진다. 산바다스포츠.

다양한 옵션도 한몫했습니다. 브롬톤은 모델이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색상, 안장, 기어 단수, 캐리어 블록까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체 조합은 수천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에요. 액세서리도 많습니다. 가방, 헬멧은 물론 의류까지 다양합니다. 이를 활용하면 세상에 몇 없는 나만의 자전거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이 점에 소비자들이 열광한 거로 분석됩니다.

클래식한 디자인도 흥행요소에요. 브롬톤 자전거는 초기 디자인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다른 자전거들은 소재나 기술에 발전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거든요.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레트로 트렌드가 인기를 끌면서 브롬톤의 디자인이 더욱 주목받은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브롬톤 인기는 상당해요. 브롬톤 공식 수입사인 산바다스포츠에 따르면 지난해 브롬톤 판매량은 약 6000여대입니다. 판매량으로 따지면 전 세계에서는 10위권에 들고, 아시아에선 일본과 1, 2위를 다투는 수치라고 합니다.

다양한 액세서리로 장식한 브롬톤 자전거. 브롬톤코리아 인스타그램.

다양한 액세서리로 장식한 브롬톤 자전거. 브롬톤코리아 인스타그램.

정장까지 차려입는 팬덤

브롬톤 마니아를 위한 특이한 행사가 있습니다. 바로 브롬톤을 타고 레이스를 벌이는 브롬톤월드챔피언십(Brompton World Championship)이에요. 200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시작했고, 2008년부터는 본사가 있는 영국으로 장소를 옮겼어요. 그런데, 참가자가 지켜야 할 드레스코드가 있습니다. 운동복을 입을 수 없어요. 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정장 재킷까지 걸쳐야 합니다. 다행히 반바지는 입을 수 있어요. 여기엔 브롬톤이 가진 철학이 반영돼 있어요. 일상 속에서도 편히 타는 자전거를 지향하거든요. 그래서 평상시 출퇴근 때 입는 정장을 입고 달리도록 한 거죠.

지난 2019년 ‘브롬톤 월드 챔피언십 코리아(Brompton World Championship Korea)’에 참여해 브롬톤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참가자들. 산바다스포츠.

지난 2019년 ‘브롬톤 월드 챔피언십 코리아(Brompton World Championship Korea)’에 참여해 브롬톤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참가자들. 산바다스포츠.

그럼 굳이 왜 레이스를 할까요. 접이식 미니벨로지만 일반 자전거 못지않게 속도가 잘 나온다는 걸 알리고 싶었대요.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엔 브롬톤을 주행하고 시속 20km 후반이 나온 걸 인증한 사람도 많더라고요.

브롬톤을 좋아하는 사람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면서 국가별 행사도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고 있어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부터 미국, 호주까지 자체 행사를 열고 있어요. 우리나라도 공식 수입사인 산바다스포츠가 2014년부터 ‘브롬톤 월드 챔피언십 코리아(Brompton World Championship Korea)’를 주관하고 있어요. 2019년엔 700명이 운집했다고 해요. 이후 코로나19로 언택트로 진행됐지만, 올해 5월에 다시 오프라인으로 개최한다고 합니다. 그 사이 브롬톤 인기가 높아진만큼 1000명 이상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해요.

산바다스포츠 관계자는 “브롬톤 네이버 카페 회원 수가 6만명으로 단일 자전거 브랜드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요. 브랜드 커뮤니티가 가장 활성화돼 있어서 대규모 오프라인 행사로도 이어질 수 있어요”라고 설명했어요.

브롬톤은 국내서 여성 분들 사이에서 팬덤이 공고하기도 합니다. 산바다스포츠에서 조사한 브롬톤의 여성 구매 비율은 28%에 달합니다. 일반적인 자전거의 여성 구매 비율이 5% 이하인 점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죠.

레저를 넘어 일상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선 고객 대부분이 브롬톤을 출퇴근용으로 사용한다고 해요. 다만, 국내서 브롬톤 고객 대상으로 구매 목적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약 3% 정도만이 출퇴근용이라고 답했어요. 대부분은 레저 등 취미용으로 사용한다고 응답했죠.

브롬톤의 최고경영자인 윌리엄 버틀러 애덤스(William Butler-Adams)는 브롬톤을 하나의 도구(tool)로 봐줄 것을 강조해요. 구석에 버려뒀다가도 이동할 일이 생기면 편하게 꺼내 타면 된다는 거죠. 귀한 수집품으로 대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튼튼한 강철 소재를 고집하는 것도 수십 년 동안 사용하는 자전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공원에서 브롬톤을 타는 시민들. 산바다스포츠.

공원에서 브롬톤을 타는 시민들. 산바다스포츠.

브롬톤이 추구하는 또 다른 가치는 도시인에게 새로운 행복을 주는 것이에요. 작게 접히는 접이식 자전거만 있으면 꽉 막힌 도로에서 벗어나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매연을 내뿜지 않으면서 운동도 할 수 있고요. 자전거를 몰 땐 스마트폰도 내려놓게 됩니다. 핸들을 두 손으로 잡아야 하니까요. 덕분에 함께하는 이와 더 많은 교감도 할 수 있습니다.

주말에 레저용으로만 타던 브롬톤을 평일에도 꺼내보는 건 어떨까요. 일반 자전거여도 좋습니다. 날이 궂을 수도, 통근 거리가 멀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에 새로운 행복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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