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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탈탈' 트랙터 출근…네덜란드 뒤집은 신생당 '농축 덕후' [후후월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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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농민-시민운동당(BBB)'이 오는 5월 구성되는 상원에서 제1당 지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BBB 대표가 지방선거가 치른 후 지난 16일 당사무실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녀의 손톱엔 트레이드 마크인 녹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AFP=연합뉴스

네덜란드 '농민-시민운동당(BBB)'이 오는 5월 구성되는 상원에서 제1당 지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BBB 대표가 지방선거가 치른 후 지난 16일 당사무실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녀의 손톱엔 트레이드 마크인 녹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AFP=연합뉴스

'탈탈탈….' 지난 2021년 3월 네덜란드 헤이그의 비넨호프 국회의사당에 트랙터 한 대가 들어섰다. 트랙터에서 내린 이는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신생 정당인 농민-시민운동당(BBB)의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56) 대표였다.

이날 플라스 대표가 탄 트랙터는 소를 키우는 농부이자, BBB 당원인 애드 발투스의 것이었다. 발투스는 "출근 전날 밤, 카롤리너와 의사당에 멋지게 등장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그는 항상 미친 액션을 좋아한다"고 회상했다.

하원의원에 당선된 카롤리너 반 데르 플라스 BBB 대표가 지난 2021년 3월 18일 트랙터를 타고 네덜란드 비넨호프 의사당에 도착해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페이스북 영상 캡처

하원의원에 당선된 카롤리너 반 데르 플라스 BBB 대표가 지난 2021년 3월 18일 트랙터를 타고 네덜란드 비넨호프 의사당에 도착해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페이스북 영상 캡처

득표율 1%→20% "괴물같은 승리" 

2019년 출범한 BBB는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반기를 들며 농촌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해온 신생 우익 포퓰리즘 정당이다. 2021년 총선에서 득표율 1%로, 플라스 대표 혼자 하원에 입성할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런데 불과 2년 뒤인 올해 지방선거에서 득표율 20%로, 네덜란드 상원 제1당으로 급부상했다. 창당 4년 만의 일이다. 네덜란드는 상원의원 전원을 지방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한다.

지난달 15일(현지시간) 치러진 네덜란드 지방선거에서 BBB는 전체 선거구 12곳 중 8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개표 과정에서 압도적인 승리가 점점 확실해지자 플라스 대표가“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라고 외쳤을 정도로, 예상 못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BBB는 오는 5월 말 구성되는 상원에서 75석 중 17석을 차지해 네덜란드 최대 정당으로 올라섰다. 지금까지 상원엔 BBB 소속 의원이 '0'석이었다. 현지 매체는 선거 결과에 대해 "BBB의 괴물 같은 승리"라는 평가를 쏟아냈다.

뤼테 총리가 이끄는 연합 정부는 BBB에 다수당 지위를 빼앗기면서, 그간 추진해오던 질소 배출 감축·석탄화력발전소 폐쇄 등 친환경 정책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뤼테 총리는 "우리가 바라던 결과가 아니다"라며 당혹감을 내비쳤다.

이날 플라스 대표는 "우리의 승리는 시민들의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손톱에 녹색 매니큐어 칠을 하고, 네덜란드 국기가 거꾸로 그려진 반지를 착용했다. 이는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농민을 지지하는 의미를 담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농민-시민운동당 대표(가운데)가 지난달 15일 지방의회 선거 개표 결과를 보고 크게 놀라고 있다. EPA=연합뉴스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농민-시민운동당 대표(가운데)가 지난달 15일 지방의회 선거 개표 결과를 보고 크게 놀라고 있다. EPA=연합뉴스

정계 입문한 농축산업 덕후

현지 매체는 BBB 돌풍의 주인공으로 플라스 대표를 지목했다. 그는 육류 산업을 취재하는 농축산업 전문 기자로 일하다, 네덜란드 농업 노동자 협회와 양돈업자 협회 홍보팀에서 경력을 쌓은 '농축산업 덕후'로 유명하다.

플라스 대표는 1967년 네덜란드 북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에 대해 "원하는 게 있다면 거침 없이 밀고 나가는, 아주 고집스러운 투사"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온건 중도 성향의 기독민주당(CDA) 소속 시의원이다. 플라스 대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플라스는 "CDA는 농촌 유권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는다"며 당 수뇌부와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다, 결국 2019년 당을 탈퇴했다. 어머니 피츠패트릭은 "우리는 항상 식탁에서 정치 얘기를 했고, 그때마다 싸웠다"고 현지 매체에 전했다.

플라스는 그해 11월, 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BBB를 창당했다. 에릭 스테긴크 BBB 당의장은 "플라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이라며 "네덜란드 상황이 달라지길 진심으로 원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플라스는 생업을 다 포기하고 연금을 당겨 받으며 BBB의 성공에 몰두했다.

"질소 배출 감축 반대" 농민 편에 서

플라스 대표와 BBB는 2019년 네덜란드 전역을 휩쓴 대규모 농민 주도 시위의 선두에 섰다. 플라스 대표는 "정부의 기후위기 관련 문제는 과장됐고, 녹색 전환에 농민들의 생계가 희생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농촌 민심을 사로잡았다.

네덜란드 남부 몰렌란덴 지방자치단체의 한 투표소 앞에 트랙터가 세워져 있다. 사진 RTL뉴스 캡처

네덜란드 남부 몰렌란덴 지방자치단체의 한 투표소 앞에 트랙터가 세워져 있다. 사진 RTL뉴스 캡처

당시 마르크 뤼테 총리는 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에 따라 2030년까지 질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일 계획을 세웠다. 특히 네덜란드 질소 배출량의 절반을 차지하던 농업 분야를 타깃으로 삼았다. 정부는 "전체 축산 농가의 가축 수를 30~50% 줄이겠다"는 목표로, 일부 농장을 폐쇄하거나 지속가능한 친환경 농장으로 전환할 것을 주문했다.

농민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도시는 가만히 놔둔 채 또 우리만 부담을 져야 하냐"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농민 시위대는 트랙터로 주요 도로와 정부 청사를 점거하며 격렬한 항의 시위를 이어갔다. 도로 위에 거름을 뿌리고, 쌓여 있는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일부 농가에선 정부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네덜란드 국기를 거꾸로 게양하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네덜란드는 세계 농축산품 수출국 3위(2021년 기준)다. 유럽 내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중계무역까지 포함하면 미국에 이어 2위인 농축산업의 대국이다. 그러나 이런 농축산업의 위상에도, 정부가 기후 위기 대책 등을 내세워 농촌에 대한 규제를 반복하고 도시와의 공공 서비스 격차가 벌어지면서 도농 갈등이 심화한 상태다.

사라 드-랭 암스테르담대학 정치학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학교와 병원 등 공공 서비스가 뒤처진 곳에 남겨진 농촌 주민들은 정부에 의해 무시당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정치 칼럼니스트 톰-얀 미스도 CNN에 "(상대적으로 낙후된) 농촌 주민들은 EU가 주도하는 환경 규제를 따라가는 정부가 도시는 가만둔 채 농촌의 생계만을 위협한다고 여긴다"고 분석했다.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농민-시민운동당 대표가 지난달 15일 지방의회 선거 개표 결과 상원 제1당 지위를 확정짓자 감격하고 있다. 그는 손톱에 녹색 매니큐어를 칠했고, 네덜란드 국기가 거꾸로 그려진 반지를 끼고 있다. 이는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지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AFP=연합뉴스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농민-시민운동당 대표가 지난달 15일 지방의회 선거 개표 결과 상원 제1당 지위를 확정짓자 감격하고 있다. 그는 손톱에 녹색 매니큐어를 칠했고, 네덜란드 국기가 거꾸로 그려진 반지를 끼고 있다. 이는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지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AFP=연합뉴스

트럼프도 지지…우익 포퓰리즘 득세? 

BBB의 핵심 표밭인 네덜란드 농촌의 인구는 약 17만 명으로, 전체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BBB는 지역과 상관없이 중도~중도우파의 표를 두루 흡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가디언은 "BBB는 기후변화 대응을 '정부 폭정'으로 몰아가며, 서민과 엘리트를 반목시키는 우익 포퓰리즘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AP통신은 "BBB의 돌풍은 환경 정책을 추진하는 주류 정치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이 핵심 지지층(농민)을 넘어 도시 일부에까지 퍼져 있음을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BBB가 정부와 농민의 갈등을, "정부와 엘리트들이 서민의 권리를 무시한다"로 전선을 확대하는 '극우'의 프레임으로 지지 기반을 넓혔다는 것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연합 전 대표 등 극우 포퓰리즘을 지향하는 정치인들도 BBB에 대해 공개 지지를 표명한 바 있다.

지난해 6월 네덜란드 헤이그 의회에서 열린 질소 정책 관련 토론회에서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농민-시민운동당 대표가 연설하고 있다. 그는 2030년까지 질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정부 계획이 농업 분야에 특히 급진적이란 이유로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6월 네덜란드 헤이그 의회에서 열린 질소 정책 관련 토론회에서 카롤리너 판 데르 플라스 농민-시민운동당 대표가 연설하고 있다. 그는 2030년까지 질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정부 계획이 농업 분야에 특히 급진적이란 이유로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BBB의 득세에, 유럽의 우익 포퓰리즘이 반이민·반EU 등 전통적 가치에서 반환경으로까지 정치 지형을 확산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녹색 정책에 반발하며 조용히 농촌 표심을 얻고 있는 무소속 의원들이 여럿 있다. 최근 들어 독일·프랑스·벨기에 등에서도 농부들이 녹색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면서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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