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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총선 표심 관리 나섰나…여당, 전기료 인상 제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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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01면

정부와 여당이 올 2분기 전기·가스요금 인상을 잠정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고물가로 민생이 어려워진 만큼 추가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겠다는 이유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에너지 공기업들의 재무 상황이 나날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가격 현실화를 미루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31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협의회 브리핑에서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 추이와 인상 변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전문가 좌담회 등 여론 수렴을 좀 더 해서 추후 인상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전기·가스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면서도 “다만 인상 시기와 폭에 대해서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제시한 복수의 안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에 대해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는 연료비 상승을 반영한 총 4가지 인상안을 제시했다. 산업부와 한전은 연내에 킬로와트시(㎾h)당 51.6원이라는 적정 인상액을 달성하려면 2분기에도 1분기와 마찬가지로 ㎾h당 13.1원을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물가 부담 등을 고려해 한 자릿수 인상안을 포함해 총 4가지 방안을 내놨지만 여당은 급격한 민심 악화를 내세워 수용 불가를 고수했다.

인상 보류 결정은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요금 인상안 보류는 김기현 대표의 지시에 따라 박대출 정책위의장이 정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관철한 것”이라며 “국제 에너지 가격이 하향 추세인데 만약 전기·가스요금을 올리면 국민 부담이 커져 민심이 흔들릴 수 있다고 김 대표가 판단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전력도매가를 결정하는 LNG 수입가격은 지난 2월 기준 t당 1296달러로,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던 지난해 9월보다 12% 낮아졌다. 3월에도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김 대표는 이날 오후 부산 가덕도신공항 예정지를 방문해 “한전이 그동안 너무 방만하게 운영됐고, 엉뚱한 일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우를 범했다”며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한 후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도리”라고 말했다.

김기현, 전기료 인상 보류 주도…전문가 “정치적 입김 차단해야”

여당은 지난달 29일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4월1일 이전에 인상 여부를 확정하기로 했던 결정을 이틀 만에 뒤집었다. 이미 30일 열린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 “전기·가스요금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최고위원들이 ‘이런 식으로 요금을 인상하게 되면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민심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우려가 터져 나왔다”고 전했다. 지난 겨울 LNG 가격 급등과 이른 한파로 벌어진 난방비 폭등 사태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당 지지율 관리를 위해서라도 민심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김 대표가 키를 쥐고 시기와 폭을 조절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치권에서 여론을 앞세워 에너지 가격 결정에 개입하는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전기요금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한전이 산업부에 신청하면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산업부가 최종 인가한다. 그러나 여당에서 개입하면서 경제 논리 대신 정치 논리가 더 크게 작용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은 정치적으로 결정해선 안 되는 사안”이라며 “원료비연동제도 강화나 전기요금을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기관을 설립하는 방안 등을 통해 정치적인 입김을 차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상을 보류하면서 언제 다시 조정안을 내놓을지 언급하지 않아 사실상 ‘무기한 연기’ 아니냐는 시선도 나온다. 인상하더라도 최소폭 인상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당정은 오는 5일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관계자를 불러 전기·가스요금 인상 폭과 시기 등을 논의하는 간담회를 연다.

정치적인 이유로 요금 현실화를 외면하면 에너지 공기업의 재무 구조가 악화돼 결국 국민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연료 가격이 안정세라지만 전력판매단가는 ㎾h당 147원으로, 여전히 발전 자회사에서 사오는 구입단가(164.2원)를 밑돈다. 이 때문에 지난해 32조원의 적자를 기록한 한전은 올해에도 대규모 적자를 피하기 어렵다. 한전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발행한 회사채가 지난달 기준으로 75조원에 달하고, 매일 38억원의 이자가 붙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연말이면 한전채 발행 잔량이 1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우려한다. 한전 관계자는 “전력 사용량이 가장 적은 2분기(4~6월)에 요금을 올리지 못하면 냉방 수요로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는 3분기(7~9월)에는 더 요금을 올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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