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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문예기금 마르면 정부 예산에 의존, 독립성 훼손될 우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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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16면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은 “문화콘텐트산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예술가를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최기웅 기자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은 “문화콘텐트산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예술가를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최기웅 기자

문예진흥기금이 고갈 위기다. 1인당 국민소득 300달러이던 1973년부터 조성돼 대한민국을 지금의 문화강국으로 만든 돈이 말라간다. 영화관·박물관 등의 입장 티켓에 부과되던 기금 모금이 2003년 위헌 판정을 받고 중단된 이래 5000억원대였던 적립금이 900억원대로 쪼그라들었다. 대신 복권기금으로 일부 충당되고 있지만, 이 돈은 창작지원이 아닌 저소득층을 위한 문화누리카드 등 향유사업에만 쓸 수 있다. 적립금이 줄어들수록 예술가 지원사업을 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불안하다. 기금이 고갈되어 정부 예산에 의존하게 되면 창작지원 사업의 독립성이 훼손되기 쉽고, 어렵게 도달한 문화강국의 위치도 흔들릴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원회는 지난 1월 정병국 신임 위원장을 선출했다. 최초의 정치인 출신 위원장이다. 5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국회 문화체육방송통신위원장과 문체부장관까지 지낸 정치인이 예술인을 대표하는 자리에 앉는다고 하자 반대 여론도 있었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회는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라는 성명을 냈다. 정 위원장은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고 했다.

“제가 문방위에 있을 때 문예진흥원이 지나치게 관(官)에 간섭받는 걸 보고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위원회로 바꾸자고 주도한 사람이거든요. 정치인이 위원으로 들어온다는 게 안 맞는 옷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많은 분들이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한다더군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많은 바람을 탔는데, 그걸 막아주는 역할을 하라는 거죠. 어쨌든 저는 문방위에서 문화예술을 11년간 팠으니 문제점을 잘 알고, 문화행정도 총괄해 봤으니 일하는 입장에서 효율성이 있을 겁니다.”

당인리 문화발전소, 세계 명소 만들 것

그는 취임하자마자 조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2월 22일부터 3월 23일까지 주제별로 14차례에 걸쳐 대국민 현장 업무보고를 강행하고 생중계까지 한 것. 50년 위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장 업무보고는 어떤 취지로 진행한 건가요.
“국감 때 보면 늘 현장 예술인들한테 욕을 먹는 기관이거든요. 공모사업을 아무리 공정하게 해도 선정되지 못한 80%의 예술가들이 불만을 품게 되니 그럴 수밖에요. 사업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알리고 개선 방안도 제안받자는 취지로 추진했습니다. 위원회가 정책고객과 함께 사업을 만들어가고 객관적으로 투명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죠. 의원 시절 들어왔던 민원을 생각하면 분위기가 험악할 거라 예상했는데, 상당히 정화된 면이 있더군요. 그간 직원들이 현장의 소리를 많이 반영했다는 증거겠죠.”

1973년 설립된 문예진흥원은 2005년 그의 주도로 ‘민간자율 현장중심’을 표방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거듭났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집행기관으로 지목된 것만 봐도 여전히 정부의 간섭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에 대한 예술인들의 요구도 계속되고 있다.

위원회가 과연 독립성을 확보했는지 의문입니다.
“기금이 줄어드니 정부 예산에 더 의존하게 됐죠. 예산 항목에 따라 지침이 내려오면, 집행기관인 우리는 써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하라는 대로 하는 건 아니다 싶어 어제도 수탁사업 결재를 보류했어요. 무슨 플랫폼 개선에 11억을 쓴다는데, 새로 구축을 해도 남을 액수잖아요. 어떤 근거로 계산됐고, 활용율은 어느 정돈지 파악부터 하자고 했죠. 윗사람들 관심 사안이라고 ‘묻지마’로 집행할 게 아니라, 심도 있는 게이트키핑 역할을 해야 해요. 블랙리스트 문제 제기가 아직까지 계속되는 것도 이해가 안 갑니다. 이미 블랙리스트 방지를 위한 소위원회 활동이 끝나고 결과보고까지 마쳤잖아요. 간섭을 최소화하려고 진흥원을 위원회로 바꾼 제가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가장 큰 숙제가 기금 확충인데요.
“이대로 기금이 말라가면 제2의 BTS, 오징어게임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술인들에게 참 미안해요. 배고프던 시절에 문화예술을 진흥하겠다고 진흥원을 만들어 기금을 모금했고, 그걸 기반으로 오늘날 한류 열풍에 문화강국 소리를 듣게 된 거잖아요. 그런데 정부 예산은 문화콘텐트산업 쪽에 편중되고 순수예술은 소외받고 있죠. 문체부 예산 7조 중 예술인 창작 지원이 1%라는 게 말이 됩니까. 세계 어느 나라도 순수예술로 돈을 벌 수 없지만 그래도 지원하는 건, 예술적 기반이 없으면 콘텐트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대로라면 문화콘텐트산업도 지속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기금 확충에 뾰족한 묘수가 있나요.
“국민적 관심을 환기해야죠. 2012년부터 추진해 온 민간 후원 캠페인 ‘예술나무운동’을 범국민 운동으로 재확산시켜 현재 400명 수준인 후원자를 3000명으로 늘리는 게 올해 목표에요. 물론 타겟은 기업이죠. 후원에 대한 피드백 차원에서 국민적 관심을 도모하려는 거에요. ESG사업을 해야 하는 기업에게 문화예술과 이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죠. 기업의 예술나무 실적을 통계화해서 온라인에서 문화지수로 평가 받게 만들어 놓을 겁니다. 이런 부분이 온라인에서 뜨거워지면 물건을 살 때도 예술나무 실적을 고려하지 않을까요. 문화지수가 낮은 기업은 나중에 불매운동도 전개될 수 있겠죠(웃음).”

요즘 그의 관심사 중 하나는 2025년 개관 예정인 당인리 문화발전소다. 1930년 세워진 국내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설비를 지하화하면서, 수명이 다한 서울화력 4호기와 5호기를 ‘문화발전소’로 전환하는 사업인데, 위원회가 위탁운영을 맡아 리모델링 예산은 확보했지만, 아직 컨셉트와 콘텐트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50주년 맞아 조수미 등 홍보대사 위촉

어떤 컨셉트를 구상중인가요.
“현장에 가 보니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게 2차산업 시대 에너지원이었다면 4차산업 시대에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문화 에너지원은 여기로부터 나가야 된다 싶더군요. 2차산업 시대 기후변화 원흉이었던 화력발전소가 이제 인류의 과제인 기후변화에 대처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적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컨셉트로 가면 세계적인 명소가 되겠죠. 4월말 스웨덴에서 70여개국 위원회 수장들이 모이는 서밋에 참석하는데, 거기서부터 당인리를 홍보하려고 해요.”
50주년 기념식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가을에 잠실 잔디광장에 몇만명을 모아 무료 공연을 할 거에요. 내용은 아직 비밀인데, 정말 보기 드문 공연이 될 겁니다. 50주년을 예술나무운동 원년으로 삼아 대국민 선포식을 하려 해요. 조수미 선생을 비롯한 월드클래스 아티스트를 다 모아서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순수예술 제2의 부흥기를 함께 열어야죠. 지난 50년 역사를 써온 결과가 문화강국이라면, 앞으로 50년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과제라 생각해요. 이미 시작됐습니다.”

“향유자 있어야 문화예술도 있어” 영화·연극·음악회 공연 즐겨

최상의 커피향을 뽑아내기 위해 시간을 재며 커피를 내리는 정병국 위원장. 유주현 기자

최상의 커피향을 뽑아내기 위해 시간을 재며 커피를 내리는 정병국 위원장. 유주현 기자

 정병국 위원장은 직원들 사이에서 ‘바리스타 정’으로 통한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 집무실에 커피 향이 가득했는데, 찾아오는 손님마다 커피를 직접 블렌딩해 내려주기 때문이다. 스피커로 쓰고 있는 빈티지 라디오에선 클래식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취향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향유자가 있어야 문화예술도 있는 거잖아요. 누구보다 예술을 사랑하고 많이 누리는 사람이 접니다. 70년대 양평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니, 영화를 보거나 음악회를 다니는 친구들이 있더군요. 음악회가 뭔지도 모르는 저는 ‘아싸(아웃사이더)’가 됐는데, 중학교 때 처음 단체로 명동 국립극장에 연극을 보러 갔어요. 김동리의 ‘무녀도’였는데, 당시 흑백TV로 보던 전양자 배우의 무대 연기가 컬처 쇼크였죠. 그때부터 의도적으로 문화에 ‘인싸(인사이더)’가 되려고 연극·영화를 쫓아다녔어요.”

요즘 핫한 서울시오페라단 ‘마술피리’를 개막날 감상할 정도로 최신 흐름에도 ‘핵인싸(핵심 인사이더)’다. 남영동 대공분실 소재의 연극 ‘미궁의 설계자’, 조각가 김윤신 전시도 감상했다. “제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갔던 사람이거든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후 엄청난 공포 속에 취조받았던 장소라서 많이 와 닿았죠. 김윤신 작가는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분인데 현지에 김윤신미술관이 있어요. 94년 대통령 순방 때 영부인 프로그램으로 미술관 방문을 기획했는데, 영부인이 못 가게 돼서 저 혼자 짬을 내서 만난 뒤 계속 교류해 왔죠. 지금 88세이신데, 오랜만에 귀국해 보니 한국 미술시장 변화에 쇼크를 받으셨대요. 그래서 제자 작업실에서 1년 동안 작업한 신작들을 공개한 건데, 우리 조각 역사도 재조망하게 된 의미있는 전시죠.”

그는 순수예술 생태계를 위해 유소년층부터 예술을 향유하게 하는 게 숙제라고 했다. 단순한 금전 지원이 아니라 잠재적 고객을 개발해야 시장이 넓어지고 예술가들의 창작 환경도 개선된다는 것이다. 4월부터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일대에서 어린이 참여형 연극 등 유소년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이유다.

“아이 키울 때 주말에는 가족끼리 늘 공연을 보러 다녔어요. 갓 돌 지난 아이를 데리고 예술의전당에 가면 당시엔 돌봄시설도 없어서 집사람이랑 한 막씩 교대로 들어갔죠. 커튼콜 때만 입구 직원한테 부탁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분위기만 보여줬는데, 그게 아이들에게 엄청난 감수성을 키워준 것 같아요. 한 아이는 음악을 하고, 한 아이는 미술관 순례가 취미죠. 그만큼 어린 아이들에게 문화적 체험이 중요해요. 일요일 낮 공연을 보러 오니 대학로에 엄마들이 애들 데리고 많이 오더군요. 그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부터 당장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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