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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일곱 잃은 그가 ‘슬픔’ 쓰지 않은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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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21면

감정의 역사

감정의 역사

감정의 역사
김학이 지음
푸른역사

제화공 요한네스 헤베를레는 17세기 독일 남서부 도시 울름 인근 네엔슈테텐 마을에 살았다. 헤베를레는 54년에 걸쳐 392쪽의 개인 연대기를 남겼다. 예속 신분인 농노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역사가들이 감탄하고 경탄한” 이 연대기는 “30년 전쟁을 서술한 역사책에 심심치 않게 등장”할 정도다. 저자 김학이 동아대 사학과 교수는 ‘저 참혹한 전화를 겪으면서 헤베를레는 무엇을 느꼈을까’ 자문한다.

저자는 연대기에서 비탄, 가슴 아픔, 공포, 경악, 기쁨, 신뢰 등의 감정어를 찾았다. 10명의 자녀를 낳아 그중 7명을 잃었고 전화로 고통받은 헤베를레인데, 연대기에 ‘슬픔’이란 감정어는 안 보였다. 저자는 헤베를레의 종교에서 단서를 찾았다. “루터가 연옥을 부인했기에 루터파 신자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루터파 목사들의 장례 설교문에는 (…) 슬픔은 표현되지 않는다 (…) 부활과 영생만을 읊조린다.” 슬픔 대신 사용된 단어는 ‘비탄’이다. 헤베를레는 ‘분노’라는 감정어도 쓰지 않았다. 역시 ‘비탄’으로 돌려 말했다. 17세기 말까지 분노는 근본적으로 신의 감정이었고, 세속에서는 제후만 쓸 수 있었다. 일반인의 분노는 광기로 간주됐다.

이처럼 감정과 그 표현에 내포된 역사적 의미를 추적하고 분석한 책이다. 책의 부제 ‘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처럼, 16~20세기 독일을 다뤘다. 저자는 루터가 1529년 작성한 『소교리 문답』과 그 시절 쏟아져 나온 각종 예언서를 통해 16세기를 지배한 감정을 ‘공포’로 결론짓는다. 이외에 서양의학의 비조 파라켈수스의 저작들, 앞서 소개한 헤베를레 등의 연대기, 감성주의 소설, 독일 기업 지멘스 창업자 베르너 지멘스의 회고록, 나치 관련 문서와 기록 등을 ‘감정의 역사’를 추적하는 주요 텍스트로 활용한다.

저자는 방대한 텍스트를 나열하고 시대별 감정을 특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속 감정어를 간략히 소개해 주의를 환기한다. 그리고 공감과 혐오가 교차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감정사 연구의 의의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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