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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기억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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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31면

‘기억의 목소리 Ⅲ’, 제주 성산포, 2021년. ©고현주

‘기억의 목소리 Ⅲ’, 제주 성산포, 2021년. ©고현주

제주의 명소 성산포. 멀리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눈에 익은 풍경 앞에, 흰 보퉁이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안에 등불을 품어 유난히 처연한 흰빛 때문에, 해질녘 성산포가 저물지 못하고 환하다.

“보자기에 등을 담아 수백 번 묶고 풀 때마다, 그들에게 이 빛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빌었어요. 서글프고 아름다운 사진 속 풍경이 또한 보는 사람들을 위무하기를 바랐습니다.”

성산포, 다랑쉬오름, 함덕해수욕장, 정방폭포…. 사진가 고현주는 등과 바구니와 색색의 보자기들을 들고, 제주의 여러 장소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모두가 ‘제주 4·3’ 당시 학살이 자행되었던, 70여 년 전 그날의 ‘현장’이다.

성산포 물자락에 216개의 보퉁이를 놓았듯이, 오름의 능선에, 폭포 밑 돌들 사이에, 그 장소에서 죽임을 당한 희생자의 수만큼 보자기로 싼 등불을 놓았다. 현장을 목격했을 늙은 폭낭의 가지에 등불을 매달았다.

풍경 앞에 제구(祭具)처럼 점점이 등불이 켜지자,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중첩되면서 묻혀 있던 ‘기억의 목소리’들이 사진 안에서 소리를 낸다.

제주가 탯자리인 작가는, 2018년에 처음 4·3을 소재로 한 사진 시리즈 ‘기억의 목소리’를 시작했다. 희생자들의 유품과 사물의 서사를 쫓은 첫 작업 중에 암 선고를 받았지만, 투병 중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그랬듯이,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녀도 제주의 풍경 속에 4·3의 비극이 감춰진 줄을 늦도록 알지 못했다.

자신의 언어인 사진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사진가로서의 의지에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사로서의 자의식이 더해져, 스스로 아픈 몸을 책려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기억의 목소리 Ⅲ’ 전시 오픈을 하루 앞두고 사진가 고현주는 소천했다.

그녀가 떠나고 다시 찾아온 봄, 4월이다. 제주 성산포를 검색하면 나오는 숱한 이미지들, 그 아름답고도 무심한 풍경 속에 고현주의 ‘기억의 목소리’가 더해지기를, 그녀가 남기고 간 이 사진들이 제주 4·3을 기억케 하기를 바란다. 기억이 우리를 나아가게 할 것이므로.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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