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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루스벨트·트루먼도 설득, 장제스·마오쩌둥쯤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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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9〉

1945년 겨울, 전 만주국 수도였던 창춘(長春)의 시장 풍경. [사진 김명호]

1945년 겨울, 전 만주국 수도였던 창춘(長春)의 시장 풍경.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은 장제스, 루스벨트, 트루먼보다 스탈린을 더 꼴 보기 싫어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마찬가지였다. 내심 마오나 스탈린보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에게 불만이 더 많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연합함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다. 루스벨트는 4년간 일본과 고전(苦戰) 중이던 중국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에게 기대가 컸다. 12월 31일 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중국, 태국, 인도차이나, 버마 경내의 일본군과 작전을 펴기 위해 ‘중국전구(中國戰區)’와 ‘연합군 참모부’를 조직하자.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네덜란드도 동의했다.” 다음날, 19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열린 26개국 연합선언 서명식에서 ‘중국전구’ 성립을 발표하며 최고 사령관에 장제스를 추대했다.

스틸웰, 장제스 ‘땅콩’이라며 무시

버마 전선을 방문관 ‘중국전구’ 총사령관 장제스와 쑹메이링을 영접하는 참모장 스틸웰. [사진 김명호]

버마 전선을 방문관 ‘중국전구’ 총사령관 장제스와 쑹메이링을 영접하는 참모장 스틸웰.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미국과의 연락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루스벨트에게 ‘중국전구, 참모장 겸 미국 대통령 대표’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가 육군장관 마셜에게 난제를 맡겼다. “미국의 국가 이익과 미·중 양측의 조화를 원만히 수행할 사람을 물색해라.” 마셜이 스틸웰을 추천하자 난색을 보였다. 이유가 명확했다. “모순덩어리다.” 마셜도 굽히지 않았다. 장황히 스틸웰을 두둔했다. “맞는 말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복잡하고 모순덩어리다. 스틸웰은 장군 같지 않은 장군이다. 사병과 같은 밥 먹고 하사관 복장이 어울리지만 미 육군에서 가장 잠재력을 갖춘 군단장이다. 장교 생활도 베이징에서 처음 시작했다. 내가 톈진(天津)에서 대대장 할 때 부대대장으로 함께 근무했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인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윤락가에서 중국인과 미군 사이에 여자 놓고 분쟁이 일어나면 ‘우리 중국인이 뭐를 잘못 했느냐’며 중국인 편에만 섰다. 오해 사기에 충분했다. 극비 문서에 접근 금지한 적이 있었다. 내 실수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찰 결과 행동만 중국인 같았지 골수 미국인이었다. 사소한 일이나 그랬지 국익에 관계되는 일은 추호의 양보도 없었다. 장제스나 마오쩌둥 같은 복잡한 모순덩어리들 상대하려면 합리적인 사람은 곤란하다. 스틸웰 정도는 돼야 장제스를 다룰 수 있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도 거론했다. “쑹은 반쪽만 중국인이다. 나머지 반은 미국인이다. 장제스와 스틸웰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면 원만한 처리를 기대해도 된다.”

마셜은 중국요리를 즐겼다. 쑹메이링이 소개한 요리사와 함께 귀국했다. 이 요리사는 미국에서 중국요릿집 주인으로 대성했다. [사진 김명호]

마셜은 중국요리를 즐겼다. 쑹메이링이 소개한 요리사와 함께 귀국했다. 이 요리사는 미국에서 중국요릿집 주인으로 대성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전구’ 참모장 스틸웰은 총사령관 장제스를 ‘땅콩’ 이라 부르며 무시했다. 장도 스틸웰이 옆에 있는 것을 싫어했다. 인도 주둔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스틸웰도 만만치 않았다. 명함에 중국전구 참모장이라는 직함을 넣지 않았다. ‘미 육군 중장 스틸웰’이 다였다. 중국을 좋아했지 중국인은 혐오했다. 민족의 존엄을 입에 달고 다니던 장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쑹메이링이 겨우 완화시키면 풀어졌다가 며칠 지나면 또 씩씩거리기를 반복했다. 장이 루스벨트에게 참모장 교체를 요구했다. 신임 참모장 웨드마이어는 큰 충돌 없이 있는 둥 마는 둥 하다 중국을 떠났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라 할 일도 스틸웰 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스틸웰이 눈 앞에서 없어지자 장제스는 시원섭섭했다. 1945년 초 버마와 윈난(雲南)을 연결하는 도로가 개통되자 애물단지였던 미국인을 잊지 않았다. 명칭을 ‘스틸웰 도로’로 하라고 지시했다. 스틸웰은 죽는 날까지 장제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말을 자주했다. “땅콩은 미국을 극도로 싫어했다. 코카콜라와 무기 외에는 좋아하는 미국 물건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각료들은 미국 유학생 출신만 기용해서 의아했다. 곳곳에 박혀있는 황푸군관학교와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 최측근 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장제스, 미 코카콜라·무기만 좋아해”

1946년 4월, 마셜과 회담을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사진 김명호]

1946년 4월, 마셜과 회담을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사진 김명호]

1945년 말, 트루먼이 중국 내전의 조종자로 급파한 마셜은 스틸웰과 친분이 두터웠다. 충고를 흘려 듣지 않았다. 장제스에게 호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국제사회에서 초 중량급 인물이었다.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루스벨트와 트루먼도 설득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쯤이야.”

1946년, 중국은 마셜의 해였다. 1945년 12월 20일부터 1946년 12월 18일, 중국을 떠는 날까지 1년간 장제스를 56번 만났다. 46년 6월에는 8번 만나 주위를 놀라게 했다. 장을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무력으로 중공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전을 통해 연합 정부를 출범시키는 미국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장제스는 담벼락이었다. 엉뚱한 제안을 했다. “군사적으로 우리가 우세하다. 군사 고문으로 영입하고 싶다. 수락해 주기 바란다.”

전 중화민국 참모총장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총통이 직접 마셜을 상대한 것은 실책이었다. 마오쩌둥은 옌안에 온 마셜과 밥 한번 먹고 공연 관람했을 뿐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마셜의 상대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대신 내세웠다. 훗날 마셜은 저우의 협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만난 사람 중 가장 버거운 상대였다.” 장제스에게는 안면을 찌푸렸다. “산만한 사람인지 철벽같은 사람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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