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서 미술 배운 이완석, 공예 통해 한·일 문화 교류 힘 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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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호 24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미술활동가 이완석(李完錫, 1915~ 1969)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도쿄의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녔다. 전공이 디자인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서양화를 공부했다. 대성중학교가 위치한 스이도바시는 오차노미즈, 진보쵸, 간다 등과 이웃하는데 메이지대학 등 대학들이 몰려 있고 책방이 많은 학생가였다. 중학생의 신분으로 대중잡지 ‘킹구’의 삽화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이완석은 그림 실력이 뛰어났다. 태평양미술학교는 니시닛포리에 있었다. 니시닛포리는 동경미술학교와도 멀지 않아 화가들의 아틀리에가 많았다. 전위적이며 도발적인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다.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이완석은 스이도바시와 니시닛포리에서 벅찬 청춘의 시간을 보냈다. 이완석과 비슷한 시기에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닌 화가로 남관(1911~1990), 이인성(1912~1950), 손응성(1916~1976) 등이 있다. 1937년 무렵 서울로 온 이완석은 조고약으로 유명했던 천일제약에 입사해 오랫동안 패키지와 광고 도안 담당을 맡았다. 천일제약은 사옥을 1952년 천일백화점으로 개장했다. 천일제약에서 인정을 받은 이완석은 천일백화점의 지배인을 거쳐 1960년에는 사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중학생 때 대중잡지의 삽화 알바도

‘모덴 디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라는 구호를 내걸며 활동했던 이완석은 디자인의 현대화를 꾀하는 한편 한국의 민예품을 일본 등 해외에 적극 소개했다. [사진 예화랑]

‘모덴 디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라는 구호를 내걸며 활동했던 이완석은 디자인의 현대화를 꾀하는 한편 한국의 민예품을 일본 등 해외에 적극 소개했다. [사진 예화랑]

이완석을 미술활동가라고 한 건 그의 활동상이 디자인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묶어 두기엔 너무나 폭넓고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완석은 1954년 7월에 천일백화점 내에 천일백화점화랑을 개관했다. 천일백화점은 종로구 예지동에 있었다. 종로4가 사거리에서 광장시장 서단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모퉁이다. 지금은 하나은행 종로4가 지점이 들어서 있다.

천일화랑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생긴 최초의 상업 화랑이었다. 개관기념전으로 동양화에 고희동, 김은호, 이상범, 이응로, 배렴, 장우성, 김영기, 이유태, 장덕, 정진철, 박생광, 이현옥, 김화경이, 서양화에 도상봉, 이마동, 김인승, 김환기, 이쾌대, 박영선, 박득순, 박고석, 윤중식, 이중섭, 장욱진, 한묵, 주경, 한홍택, 이세득, 권옥연, 이종무, 정규, 조병현, 박수근, 황유엽, 김두환, 최영림, 손응성이, 조각에 윤효중, 김경승이 출품했다.

맨 뒷줄 왼쪽부터 두 번째에 이완석, 앉은 줄 왼쪽부터 도상봉, 청전 이상범, 이종우 한사람 건너 고희동, 앞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환기, 장욱진, 유작 3인전 추도식, 천일백화점 옥상. [사진 이인성 기념사업회]

맨 뒷줄 왼쪽부터 두 번째에 이완석, 앉은 줄 왼쪽부터 도상봉, 청전 이상범, 이종우 한사람 건너 고희동, 앞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환기, 장욱진, 유작 3인전 추도식, 천일백화점 옥상. [사진 이인성 기념사업회]

두 번째 전시는 그해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열렸다. ‘김중현, 구본웅, 이인성 유작 3인전’은 한국전쟁 중에 세상을 떠난 세 명의 화가를 기리는 전시였다. 유작전의 전시 오프닝에 맞추어 추도식이 열렸다. 이 전시는 대한미술협회와 서울신문사 주최로 되어 있으나 전시비용은 이완석이 모두 다 댔다. 고희동, 이종우, 이상범, 도상봉, 김환기, 장욱진 등이 천일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다. 이인성(1912~1950)의 아들 이채원(1950~ )은 유족의 자격으로 추도식에 갔다. 단상에는 화분이 놓여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화분이 다섯 살배기 아이 이채원 앞으로 떨어져 깨졌다. 어른들이 달려와서 다친 데가 없나 하고 걱정해줬다. 천일화랑은 마산 출신의 이림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그해 11월 무렵에 문을 닫는다. 미술 전시가 공보원 아니면 다방에서 열리던 당시의 어리숙한 상황에서 상업 화랑의 경영은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1960년 12월, 아시아미술가 국제연합결성 예비회담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이완석, 청강 김영기, 김경승, 권영휴, 김순련 등은 타이베이로 향했다. 수화 김환기가 김포공항으로 나와서 배웅했다. 타이베이에 도착한 이완석은 서예가 우우임(于右任, 1879~1964)을 만나 글씨를 받았다. 서울 명동의 화교학교에 ‘한성화교소학’이란 초서체 현판글을 남긴 우우임의 필력은 여전히 힘찼다. 대만, 필리핀, 태국, 베트남, 홍콩, 싱가포르, 캄보디아를 여행한 뒤 마지막 일정으로 도쿄에 도착했다. 해가 바뀌어 1961년 2월 5일, 음력 설날이 되었다. 이십몇 년 만에 도쿄에 다시 온 감개무량의 이완석은 스이도바시에서 멀지 않은, 메이지대학 언덕의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아내에게 다정한 편지를 썼다. 아내가 부탁한 수달피 목도리를 샀다는 뿌듯한 소식을 살짝 실어보았다.

1946년에 조선공예가협회 창립위원(회장 김재석)으로 참여한 바 있는 이완석은 공예에 관한 애정을 멈춘 적이 없었다. 1964년 2월에 천일백화점 안에 한국민예품연구소를 개설했다. 공예인들은 물론 수많은 미술인의 사랑방이 됐다. 우리의 옛 기물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 권옥연, 정규, 미술평론가 석도륜, 이경성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일본의 명문 일고 출신으로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석도륜은 베품과 인품의 교양인 이완석을 평생 존경했다.

조선공예가협회 창립위원으로 활동

이완석이 디자인한 ‘유작 3인전’ 포스터. [사진 예화랑]

이완석이 디자인한 ‘유작 3인전’ 포스터. [사진 예화랑]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조각가 오카모토 타로,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 등 일본의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서울을 찾았다. 이완석도 바빠졌다. 한국의 미술을 사랑한 일본인 중에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와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형제가 있었다. 형은 조선의 도자기를, 동생은 조선의 소반을 연구했다. 1964년 친한파 화가 가토 쇼린진(1898~1983)이 문화 사절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서 이완석을 만났다. 그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을 찾고 있었다. 이문동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한 다쿠미의 무덤은 소재가 불분명했다. 다쿠미 생전에 친했던 국립임업시험장 사람들의 도움으로 닷새나 걸려 겨우 찾았다. 이완석이 빠져선 안 될 일이었다.

민예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 1961)가 창안한 말이다. 이완석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도쿄 고마바에 세운 일본민예관에서 발행하는 민예 160호(1966년 4월호) ‘한국의 민예’ 특집에 ‘한국의 민예품에 대하여’를, 민예 189호(1968년 9월호)에 ‘아사다 다쿠미의 묘’라는 글을 썼다. 이완석은 한국과 일본의 교류와 우호를 도모하는 단체인 일한친화회에서 발행하는 친화 145호(1965년 12월호)에 ‘한국민예품전을 앞두고’를, 또 친화 177호(1968년 8월호)에는 다쿠미의 무덤 찾기에 대한 내용의 ‘망우의 사랑’이란 글을 썼다. 이완석은 공예를 통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교류에 지극했다. 드디어 1966년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한국민예품전’이 도쿄 니혼바시 미쓰코시 백화점 전시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주최는 일본민예협회, 일한친화회, 한국민예품연구소이고 협찬은 주식회사 타쿠미가 맡았다.

이완석은 자식들에게 자상했다. 주말이면 가족들을 위해 손수 스키야키 요리를 했다. 그는 도쿄에서 유학했지만 소고기와 간장에다 배추, 대파 등 야채를 넣어 자작하게 졸여 먹는 관동식 스키야키가 아닌 간장과 청주에 설탕을 녹인 흥건한 국물에 배추, 파, 두부, 당면, 곤약 등을 푸짐하게 넣은 관서식 스키야키를 좋아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스키야키였다. 짭짤하게 익은 부드러운 소고기를 날달걀에 찍어 먹는 재미가 좋았다. 이완석은 옷감을 사다가 딸들의 옷, 가방을 디자인하는 걸 좋아했다. 이완석의 장녀 이숙영(1947~2010)은 아버지를 몹시 따랐다. 1969년 8월, 이완석은 일본에서 온 한국사료연구소장 김정주를 시내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소고기 전골에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는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집으로 돌아가 그 길로 영면에 들었다.

김태성 이숙영 부부는 1978년 4월, 인사동에서 예화랑을 열었다. 개관전으로 김태성의 가계와 인연이 깊은 서화협회의 화가들이 중심이 된 근대명가서화전을 열었다. 안중식, 조석진, 정학교, 강진희, 김응원, 오세창, 김규진, 김태석, 김용진 등 16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해 시월에는 이숙영의 부친인 이완석과 관련이 깊은 서양화가들로 구성된 전시회가 열렸다. 정규, 도상봉, 박수근, 구본웅, 김환기, 손응성, 한묵, 권옥연, 남관, 임직순, 김흥수, 이세득, 이성자. 유영국 등 18명이 작품을 출품했다. 김태성의 가계는 1887년 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에 가서 이듬해 볼티모어의 기찻길을 문인화 기법으로 사생한 서화가 강진희(1851~1919)로 이어진다. 이완석의 외손녀 김방은이 온축과 창신으로 강남 신사동에서 예화랑을 이끌고 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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