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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넘게" 이런 반응이 없다...北, 통일부 '인권 보고서'에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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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가 인권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내정 간섭”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던 북한이 30일 통일부가 최초로 공개한 ‘북한 인권보고서’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묵했다.

북한의 인권 침해, 두고만 볼 것인가. [일러스트=김지윤]

북한의 인권 침해, 두고만 볼 것인가. [일러스트=김지윤]

북한 노동신문 등 관영매체는 31일 인권보고서가 지적한 김정은 정권의 참혹한 인권유린 실상과 관련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 대신 3월 내내 벌여온 연쇄 도발 사실을 부각하며 “세계 앞에 우리 국가의 불가역적인 초강세와 하늘 끝에 닿은 조선 인민의 분노와 멸적의 의지를 더욱 똑똑히 각인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날 보도엔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인 신형전술유도무기 발사(9일), ICBM ‘화성-17형’ 발사(16일), 핵무인수중공격정 ‘해일’의 폭발시험(21∼23일) 등 3월의 주요 도발 사례가 구체적으로 나열됐다. 다만 지난 28일 공개한 전술핵탄두 ‘화산-31’에 대한 언급은 빠졌다.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해선 별도의 성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국제사회가 북한 인권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인권유린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즉각 반발했던 전례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화성포-17형) 등 각종 미사일을 발사했던 3월을 되돌아보며 "위대한 강철의 영장을 높이 모신 조선의 초강력, 천만 인민의 멸적의 기상과 의지가 뚜렷이 과시된 3월"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31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화성포-17형) 등 각종 미사일을 발사했던 3월을 되돌아보며 "위대한 강철의 영장을 높이 모신 조선의 초강력, 천만 인민의 멸적의 기상과 의지가 뚜렷이 과시된 3월"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뉴스1

북한은 지난 1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인권과 관련한 비공식 회의(17일)을 소집하자 외무성 성명을 통해 “존재하지도 않는 우리의 인권문제를 논의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공식 모임이라는 것을 강압적으로 벌려놓으려고 기도하고 있다”며 “비열한 인권 압박 소동을 대조선적대시정책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으로 강력히 규탄하며 전면 배격 한다”고 밝혔다.

이 성명은 북한 외무성이 5년 6개월만에 처음으로 낸 전체 기관 차원의 성명이었다. 그만큼 북한이 인권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의미다.

북한은 지난해 4월 유럽의회가 ‘북한의 종교 소수자 박해 등 인권 상황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을 때도 유럽의회을 향해 “주제 넘는 사기 집단”이라며 “종교 차별과 민족 배타주의, 어린이 권리 침해 등 본인들의 인권유린도 바로잡지 못하면서 주제넘게 남의 인권을 언급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9년 11월 14일(현지시간) 열린 유엔본부에서 유엔총회 산하 제3위원회 회의. 인권담당 제3위원회는 당시 회의에서 북한의 인권침해를 비판하고 즉각적인 개선을 촉구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연합뉴스

2019년 11월 14일(현지시간) 열린 유엔본부에서 유엔총회 산하 제3위원회 회의. 인권담당 제3위원회는 당시 회의에서 북한의 인권침해를 비판하고 즉각적인 개선을 촉구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연합뉴스

인권 문제는 핵무기 개발과 함께 국제사회가 북한을 압박하는 핵심축으로 꼽힌다. 북한의 입장에선 김정은 정권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아킬레스건’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북한은 2014년 유엔 인권조사위원회(COI)가 북한인권보고서를 발표하자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명의의 성명을 내고 “북한에는 인권 침해 사례가 없다”며 “인권보호를 빌미로 한 어떠한 정권교체 시도와 압박에도 끝까지 강력 대응하겠다”고 반발했다. 북한이 인권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실질적인 ‘정권교체 시도의 압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반영된 성명이다.

전임 정부와 달리 북한 인권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윤석열 정부는 전날 발간한 북한인권보고서와 관련한 다양한 홍보 콘텐트를 제작해 국내외에 배포할 계획을 밝혔다.

북한 인권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과 북한 여성 인권 실태 전시회가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실 주최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인권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과 북한 여성 인권 실태 전시회가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실 주최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효정 통일부 부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국민들이 북한의 인권 실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며 “보고서가 북한 인권 분야의 공신력 있는 기초자료로 국내외에서 널리 활용될 수 있도록 온ㆍ오프라인으로 배포하는 한편 영문판도 발간해 북한인권 문제에 관해 국제사회와도 지속해 협력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제 인권단체들도 이같은 움직임에 환영의 입장을 밝혔다.

필 로버트슨 휴먼라이츠워치 아시아 담당 부국장은 미국의소리(VOA) 방송을 통해 “인권보고서는 김정은 정권의 일상적인 잔혹 행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국제사회는 북한의 끔찍한 인권침해에 대해 압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버트 킹 전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도 VOA와의 통화에서 “인권보고서를 처음 공개한 것은 인권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접근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 양강도의 압록강변에서 인민군 병사가 총을 맨 채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사진은 2020년 9월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조선족자치현에서 촬영됐다.연합뉴스

북한 양강도의 압록강변에서 인민군 병사가 총을 맨 채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사진은 2020년 9월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조선족자치현에서 촬영됐다.연합뉴스

전날 처음으로 공개된 405쪽 분량의 북한인권보고서에는 한국 문화 콘텐트를 유포하는 등의 이유로 사실상의 즉결 총살이 이뤄지는 등의 참혹한 북한의 인권 유린 실태가 담겨있다. 정부는 북한인권법 제정 이듬해인 2017년부터 매년 북한인권보고서를 발간했지만, 지금까지는 탈북민의 개인정보 노출 우려와 북한의 반발 등을 고려해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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