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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 위 상자 속 아기 시신…日대법원, 베트남 여성에 무죄 왜

중앙일보

입력

일본 대법원이 지난 24일 쌍둥이를 사산한 뒤 시신을 골판지 상자에 넣어 방치한 베트남 여성에게 1·2심 유죄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아사히(朝日) 신문 등은 "일단 기소되면 99.9% 유죄가 나오는 일본 사법 환경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전했다.

일본에서 사산한 쌍둥이의 시신을 골판지 상자에 넣어 방치했다며 1·2심서 유죄판결을 받은 전직 기능실습생 베트남 여성에게 지난 24일 대법원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베트남 여성 측 관계자가 '무죄'라고 적힌 글씨를 들어보이고 있다. 트위터 캡처

일본에서 사산한 쌍둥이의 시신을 골판지 상자에 넣어 방치했다며 1·2심서 유죄판결을 받은 전직 기능실습생 베트남 여성에게 지난 24일 대법원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베트남 여성 측 관계자가 '무죄'라고 적힌 글씨를 들어보이고 있다. 트위터 캡처

아이를 사산하고 방치한 베트남 여성은 2018년부터 일본에서 기능실습생으로 일해온 레이 티 투이 린(24)이다. 린은 2020년 11월 구마모토(熊本) 현의 한 감귤농장 기숙사에서 홀로 남자 쌍둥이를 낳았다.

오랜 진통을 견뎠지만 사산이었다. 린은 골판지 상자에 아기에게 붙여주려 했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 수건을 깐 뒤 시신을 넣었다. '미안하다'는 편지도 넣어 상자를 선반 위에 놓아두었다. 린은 "몸이 회복되면 베트남식 장례법으로 묻어줄 생각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린은 산부인과에서 진찰받던 중 사산 사실이 드러났다. 병원의 신고를 받은 구마모토현 경찰은 '시신 유기 혐의'로 린을 체포했다.

쌍둥이 남아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이들. 구마모토 신문 트위터 캡처

쌍둥이 남아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이들. 구마모토 신문 트위터 캡처

린은 조사 과정에서 "외국인 실습생의 임신·출산 사실이 알려지면 강제 귀국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아이들을 잘 묻어주고 싶었지만, 일본 장례 절차를 몰랐을 뿐 시신을 버린 게 아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구마모토 지방법원은 "사산을 숨기길 목적으로, 시신을 골판지 상자에 보관한 채 하루 이상 뒀다"고 판단했다. 1심에선 징역 8개월, 집행유예 3년의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2심에서는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감형됐다. 린의 변호인 측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대법원에선 린의 행위에 '시신 유기죄'를 물을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시신 유기죄는 사망자를 공경하지 않거나 종교적 감정을 해치는 형태로 시신을 방치하거나 숨길 때 성립한다.

대법원은 "린이 시신을 상자에 넣은 행위가 시신 발견을 어렵게 했지만, 관습상의 매장과 양립할 수 없는 조치는 아니다"면서 1·2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로 결론 내렸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사산한 아이의 시신에 대한 대법원이 판단 기준을 보여준 사례"라면서 "판사 4명 모두 결론이 일치했으며 향후 비슷한 사안에서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전했다.

최고 검찰청(대검찰청)의 요시다 세이지(吉田誠治) 공판부장은 "(피고가 유죄라는) 검찰 측 주장이 인정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다"고 밝혔다.

도쿄신문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임신·출산을 하는 외국인 여성 실습생에게 불리한 일본의 노동 환경이 재조명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SNS 상에는 린의 행위에 대한 비난도 있었지만, '고립 출산'에 내몰린 여성에 대한 동정 여론도 일었다. 최종심을 앞두고 린의 무죄 판결을 요구하는 9만5000명의 서명이 모이기도 했다고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

일본 노동법은 외국인 실습생에도 적용되기에 임신·출산 때문에 귀국·퇴직을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외국인 여성 실습생들은 임신 사실을 고용주에게 알리면 "벌금 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라"라거나 낙태를 강요당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일본 출입국 체류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실습생 조사대상 650명 중 26.5%가 "임신하면 일을 그만두게 하겠다"는 협박성 발언을 실제로 들었다고 응답했다. 재일 외국인을 돕는 비정부단체(NGO) 콤스타카의 사쿠마 준코(佐久間順子) 사무국장은 "임신 등으로 강제 귀국을 강요당한 외국인 사례가 많아 상담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국가가 이 문제를 방치하고 강제 해고를 눈감아주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린은 무죄다", "고립출산에 몰아넣지 않는 사회를!"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든 사람들. 트위터 캡처

"린은 무죄다", "고립출산에 몰아넣지 않는 사회를!"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든 사람들. 트위터 캡처

린 역시 해고가 두려워 출산 직전까지 임신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린은 부모가 버는 연 수입 5년 치에 해당하는 150만엔(약 1480만원)을 파견업체에 내고 왔기에 갚아야 할 빚도 많았다. 또 일본에서 번 돈의 대부분은 고향에 보내고 있었다.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나오자, 린은 아사히신문에 "고립 출산한 여성에게 형벌을 가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면서 "외국인 실습생들이 강제로 내쫓기지 않고 출산할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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