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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20대 일본 유학서 깨달은 것 “왜 열심히 일해야 하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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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20세가 되면서 대학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 몇 해 머무는 동안에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기에 게으른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살았구나, 하는 죄책감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너무 나태했다. 놀고먹는 팔자가 상팔자라고 했고 노랫가락에도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는 흥겨움이 깔려있었다. 양반들은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이쑤시개는 물고 다녔다. 배불리 먹고 나서는 모습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내 아내 얘기도 그랬다. 어려서 친구들과 놀면서, 출가하게 되면 우편배달부한테 가야지 농사꾼에게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일본인들과 같이 열심히 일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었다.

‘놀고먹는 게 상팔자’ 될 수 없어
절대빈곤 타개한 ‘한강의 기적’
기업인·노조도 새로 태어나야
일의 가치는 서로 도움 되는 것

6·25 때 부산에서 꾼 꿈 아직 생생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6·25 때다. 부산진에서 해운대로 가는 길가에 있는 대연동 교회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꿈을 꾸었다.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산 밑에 있는 저수지로 갔다. 한없이 두껍게 얼음이 깔렸었다. 그 사람이 36년 동안 얼어 있던 얼음이 깨질 테니까 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연못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연못 밑을 내려다보았다. 까만 개미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 있었는데, 한 마리도 멈추지 않고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개미가 일본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그가 “이제 너희도 저렇게 된다”라며 불쑥 사라졌다. 무슨 꿈이었을까.

이후 20여년이 지났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였다. 우리 국민 전체가 ‘잘살아 보자’ 구호 밑에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는 미숙했으나 국민 대중을 일터로 끌어들인 ‘새마을 운동’이 불처럼 일어났다. 국민 전체가 일을 사랑하는 자세와 열정을 갖추게 되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한강의 기적’을 창출하는 변화를 만들었다.

1981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발표한 국민 의식구조 조사에 따르면 ‘당신은 먹을 것이 있고 생활이 안정되어도 일을 하겠느냐’는 항목이 있었다. 국민의 86%가 일하겠다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수치를 보고 눈물을 느낄 정도였다. 이제는 경제적 희망이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6·25의 쓰라린 경험의 선물이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호주의 호크(Bob Hawke) 수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호주로 돌아가 자국민에게 “한국은 지금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낮지만 곧 앞지르게 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의 경제국이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삼성·현대·엘지그룹을 비롯한 중견기업들 모두가 연수원을 갖고 있던 때였다. 회사 간부들이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는 일하고, 오후에는 연수원에 입소해 일요일까지 교육을 받았다. 호크 수상은 “그렇게 공부하면서 일하는 나라”는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주에서는 주말 교육은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교육수당을 받지 않고는 절대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는 사고가 상식이었다.

지금과 같은 노동조합 운동은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산국가의 노동조합은 정권을 쟁취할 때까지는 파업과 반(反)정부 투쟁을 한다는 사실과 정권을 쟁취한 후에는 절대로 파업이나 정치비판은 못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지금과 같은 노조들의 파업이나 반정부 투쟁을 했다면 빈곤 극복과 경제건설의 원동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일을 사랑하면서 즐겼고 그 정신이 행복과 인생의 가치를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든 상황이 변했다. 지난 몇 해 동안에 경제적 위기가 높아졌다. 국내외적으로 이를 극복할 책무가 막중해졌다. 국민의힘 정부와 국민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겁기만 하다. 하지만 두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문재인 정부에서처럼 경제를 정치적 목적과 이념에 맞추어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경제는 정치의 일차적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을 사랑하고 즐기지 못하는 국민은 행복과 국가적 번영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일을 기피하는 개인은 인간의 사회적 권리를 포기하고, 일의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과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운동도 더 능률적이고 국가를 위한 즐거운 사명이다. 집단이기주의에 빠지게 되면 일하는 사람의 본분과 의무를 포기하는 잘못이다. 사회에 고통을 안겨주는 집단이기주의는 배격돼야 한다. 기업인들은 사회에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경영을 하는 것이지 단지 더 많은 소유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잘못된 사고를 버려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나라

일의 가치란 무엇인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좀 더 많은 사람이 행복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는 일은 사회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하는 일을 통해 국가와 국민의 번영과 행복이 증대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면서 진리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놀기 위한 인생이 아니다. 더 많이 정신적 가치를 찾아 성장하면서 더 보람 있는 일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길이다. 이웃과 나라를 위해 인간적으로 성장하면서 즐겁게 일하는 인생보다 귀한 삶은 없다. 공부하면서 일하는 국민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