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 위기’ 우려가 급한 불을 껐지만, 서서히 확산하는 또 다른 유형의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가 나왔다.
2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수석 경제논설위원인 그레그 입은 “금융계가 '슬로모션 은행 위기(slow-motion banking crisis)'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금융위기는 일반적으로 순식간에 금융시장을 흔들지만, 슬로모션 위기는 서서히 시스템이 무너지며 경기침체로 나타날 수 있다. 앞으로 몇 년간 미 은행들에서 예금 인출과 신용 경색 등이 발생해, 시스템적 위기가 서서히 확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레그 위원은 “통상적인 의미의 금융위기는 아니지만, 최종 결과는 똑같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러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는 자금 여력이 부족해진 은행들의 신용 공급이 줄어들 가능성이 커서다. 아미트 세루 스탠퍼드대 교수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금리 인상 여파로 SVB보다 더 큰 자산가치 손실률을 기록 중인 미국 은행이 전체의 11%인 500여 곳으로 추정된다. 특히 미 상업용부동산(CRE) 시장 대출의 70% 담당하는 중소은행이 약한 고리로 꼽힌다. 고금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공실률이 높아지고 빌딩 가격이 하락하는 것에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 높은 수익의 더 안전한 투자처를 찾으려는 고객들의 예금 인출도 중소은행의 부담을 키우는 요소다. 이를 두고 조셉 어베이트 바클레이스 전략가는 “두번째 물결(second wave)”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은행에서 돈을 못 찾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발생한 1차 예금 이동은 거의 끝나고 있을 것”이라며 “2차로는 예금이 머니마켓펀드(MMF)로 이동해 은행들이 이중고를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모바일 뱅킹의 발달과 소셜미디어의 확산으로 불안 심리가 전파되면 빠르게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도 위기를 키운다. 미국의 인터넷·모바일 뱅킹 이용 비중은 2017년 52%에서 2021년 66%로 늘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에 따르면 SVB 파산 하루 전인 이달 9일부터 15일까지 미 소규모 은행의 예금이 1200억 달러 빠져나갔다. 이어 이번 달(23일까지 집계) MMF로 몰린 돈은 2860억 달러(약 371조8000억 원) 이상이다. 은행 고객들의 공포심에 따른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수준은 아니어도, 보다 안전하고 더 높은 수익률을 주는 상품으로 중소은행의 자금이 계속 빠져나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28일 블룸버그는 미 최대 증권사인 찰스슈왑이 유동성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짚었다. 장기 채권을 많이 보유한 찰스슈왑의 미실현 손실이 지난해 290억달러로 불어났고, 고객들이 MMF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월트 베팅어 찰스슈왑 최고경영자(CEO)가 “예금이 100% 바닥나더라도 충당할 수 있는 충분한 유동성이 있다”고 말하는 등 위기론을 진화하는 중이지만, 시장에선 찰스슈왑 실적이 악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