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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삼겹살집이 카페 됐다…확 달라진 그 시절 낡은 '엠티 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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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영봉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남기는 청춘의 모습. 지난해 국내 입국 규제가 대폭 완화된 이후로 북한산을 찾는 외국인도 크게 늘었다.

북한산 영봉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남기는 청춘의 모습. 지난해 국내 입국 규제가 대폭 완화된 이후로 북한산을 찾는 외국인도 크게 늘었다.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난 사람이라면 북한산 아랫마을 우이동에 관한 추억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다. 북한산(837m)을 찾는 등산객의 오랜 아지트이자, 1980~90년대 대학생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엠티 촌이 우이동이었다. 어쩌면 우이동은 서울에서 가장 서울답지 않은 동네였다. 북한산 서쪽 자락에 틀어 앉은 이 동네에선 고층빌딩보다 산등성이가, 화이트칼라보다 등산복 차림의 탐방객이 더 흔히 보여서였다. 동네 면적의 80%가 북한산 국립공원의 품이다.

낡은 유원지 이미지가 강했던 우이동이 요즘 확 달라졌다. 코로나 이후 아웃도어 유행을 타고 젊은 층이 북한산 주변으로 몰리면서다. 엠티 촌과 토속 음식점이 즐비하던 우이천 계곡을 따라 럭셔리한 리조트와 캠핑장, 카페와 베이커리 등이 줄줄이 들어서면서 현재 우이동은 강북에서 가장 트렌디한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만 들여다봐도 변화가 보인다. 소위 ‘아재’ 세대에게 ‘등산’ ‘MT’ ‘백숙’ 따위가 우이동의 연관 검색어였다면, MZ세대에게 우이동은 ‘북한산 인증샷’ ‘마운틴뷰 호텔’ ‘카페 데이트’ 등의 태그로 더 친숙하다.

2004년 북한산 백운대의 풍경. 인증샷 포즈도 옷차림도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요즘은 정상에서 스마트폰부터 꺼내 들지만, 그 시절에는 다들 '야호'를 외쳤다. 중앙포토

2004년 북한산 백운대의 풍경. 인증샷 포즈도 옷차림도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요즘은 정상에서 스마트폰부터 꺼내 들지만, 그 시절에는 다들 '야호'를 외쳤다. 중앙포토

백숙집 옆 베이커리

 낡은 먹자골목 이미지가 강했던 우이동 유원지 주변으로 근래 젊은 감각의 카페와 베이커리, 고급 숙소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사진은 우이동 유원지 초입에 자리한 파라스파라. 백종현 기자

낡은 먹자골목 이미지가 강했던 우이동 유원지 주변으로 근래 젊은 감각의 카페와 베이커리, 고급 숙소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사진은 우이동 유원지 초입에 자리한 파라스파라. 백종현 기자

지난 15일 대략 20년 만에 우이동 유원지를 찾았다. 기억 속 우이동은 허름한 엠티 촌이었다. 숲 내음만큼 술내 풍기는 만취의 추억이 여전히 진하다.

우이동 유원지는 북한산 서쪽 자락 가을철 단풍 코스로 이름난 우이령길(소귀 고개) 초입에 형성된 뿌리 깊은 먹자촌이자 엠티 촌이다. 지금도 북한산과 우이천이 만나는 깊은 계곡을 따라 30~50년씩 된 식당이 30개 이상 줄지어 있다. 대부분이 너른 마당과 계곡을 끼고 있는 가든‧민박형 식당으로, 1980~90년대 대학생이 단체로 몰려드는 아지트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우이동 유원지는 대학생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중장년층과 가족 단위 고객을 상대하는 계곡형 먹자촌 이미지가 굳어졌다.

유원지 안쪽 옛 연수원 시설을 대형 베이커리 카페로 개조한 하이그라운드 제빵소.

유원지 안쪽 옛 연수원 시설을 대형 베이커리 카페로 개조한 하이그라운드 제빵소.

백숙과 삼겹살이 흔했던 우이동 유원지의 상차림이 요즘 몰라보게 달라졌다. 유행과는 담을 쌓았던 이곳에 근래 젊은 감각의 상점이 속속 들어서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화의 계기는 코로나바이러스다. 단체 손님을 상대하다 사적 모임 규제, 집합 금지 등 조치로 막대한 손해를 본 우이동 상인들이 하나둘 카페 창업에 나선 것이다.

4대를 이어온 한정식집 ‘옥류헌(현 카페 ‘릴렉스’)’도, 40년 내력의 능이백숙집 ‘청산가든(현 카페 ‘산아래’)’도 그렇게 카페가 됐다. 연수원을 고쳐 대형 베이커리 카페로 거듭난 ‘하이그라운드 제빵소’도 있다. 도심에선 보기 힘든 ‘신상 계곡 뷰’ 카페와 빵집은 MZ세대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이 났다. 지난가을에는 주말 하루 가게마다 10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단다. 낡은 유원지가 코로나로 답답한 일상을 보내던 젊은 층의 새로운 아지트로 거듭난 셈이다. 군사정권 시절 정·재계 인사가 은밀히 드나들었던 북한산 도선사 인근의 요정 ‘선운각’도 지난해 한옥 카페로 거듭나며 손님 몰이에 나서고 있다.

카페 릴렉스의 원영배 사장은 “7만원짜리 한식 코스에서 7000원짜리 아인슈페너로 주력 메뉴가 바뀌었다”며 웃었다. 하이그라운드 제빵소 박길자 사장은 “20~30대 젊은 층이 섞여드니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전했다.

4대를 이어오던 한정식집 옥류헌은 지난해 그윽한 분위기의 카페 릴렉스로 탈바꿈했다.

4대를 이어오던 한정식집 옥류헌은 지난해 그윽한 분위기의 카페 릴렉스로 탈바꿈했다.

1960~70년대 군사정권 시절 요정으로 이름을 날렸던 북한산 자락의 '선운각'도 한옥카페로 거듭났다.

1960~70년대 군사정권 시절 요정으로 이름을 날렸던 북한산 자락의 '선운각'도 한옥카페로 거듭났다.

자쿠지에 누워 본 북한산 

북한산 자락의 럭셔리 리조트 '파라스파라'. 북한산 인수봉을 내다보며 온수풀을 즐길 수 있다.

북한산 자락의 럭셔리 리조트 '파라스파라'. 북한산 인수봉을 내다보며 온수풀을 즐길 수 있다.

우이동의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 공간은 거대한 숙박시설이다. 북한산 자락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악명 높은 흉물이 있었다. 건설사의 부도·법정관리로 공사를 멈춘 대형 콘도가 10년 가까이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새 주인을 찾아 2년 전 8월 오픈한 것이 우이동 유원지 초입의 ‘파라스파라’다.

14개 동 334개 객실, 야외 수영장 따위를 갖춘 럭셔리 리조트의 등장으로 북한산과 우이동을 즐기는 문화도 사뭇 달라졌다. 김선희 문화해설사는 “등산복 차림의 탐방객 못지않게 쫙 빼입은 나들이객의 비중이 높아졌다”고 요약했다. 북한산이 더는 정상 등정만 노리고 찾아오는 산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제는 북한산을 내다보며 노천욕을 할 수 있고, 동동주와 파전이 아니라 파인다이닝과 달콤한 디저트로 산행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인수봉과 노천탕을 함께 담을 수 있는 루프탑 자쿠지, 북한산을 똑 닮은 ‘북한산 포시즌 케이크(1만5000원)’ 등이 MZ세대 사이에서 소셜 미디어의 명물로 자리 잡고 있다. 파라스파라의 탁지영 마케팅팀장은 “어디서든 북한산 풍광을 누릴 수 있도록 객실 창문 하나, 디저트 메뉴 하나까지 세심히 설계해 만족도가 높다”고 전했다.

파라스파라 리조트 내에서 인기 메뉴로 뜨고 있는 '북한산 포시즌 케이크'. 대부분의 손님이 인수봉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담아간다.

파라스파라 리조트 내에서 인기 메뉴로 뜨고 있는 '북한산 포시즌 케이크'. 대부분의 손님이 인수봉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담아간다.

‘우이동 가족 캠핑장’도 따끈따끈한 핫플레이스다. 강북구가 이태 전 3월 파라스파라 건너편 너른 부지에 31개 동(데크 27개, 글램핑 4개) 규모의 캠핑 시설을 마련했다. 주중‧주말 할 것 없이 일반 데크는 3만원, 글램핑 시설은 9만원을 받는다. 가성비 캠핑장으로 입소문인 난 덕에 예약일(매달 10일 오픈)마다 이른바 ‘광클 전쟁’이 벌어진단다. 캠핑장 관계자는 “캠핑용품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글램핑장의 경우 평일에도 빈자리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2021년 3월 문을 연 우이동 가족캠핑장. 사진 강북구

2021년 3월 문을 연 우이동 가족캠핑장. 사진 강북구

외국인도 반한 북한산

젊은 등산객들이 영봉 인근 너럭바위에 앉아 북한산 정취를 즐기고 있다.

젊은 등산객들이 영봉 인근 너럭바위에 앉아 북한산 정취를 즐기고 있다.

북한산에서도 젊은 변화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연간 500만 명가량 찾던 북한산 국립공원은 근래 탐방객이 부쩍 늘고 있다(2020년 약 656만 명, 2021년 약 736만 명 입장). 코로나 이후 단체 등산객은 줄었지만, 개별 등산객 규모가 되레 커졌다.

등산‧아웃도어 문화의 유행이 최근 MZ세대까지 확대된 영향이 무엇보다 크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북한산’이 MZ세대의 전유물이 된 지 오래다. 서울 도심을 내다보는 인생 사진 명소이자, 레깅스룩·고프코어룩 등 다양한 멋을 뽐내는 아웃도어 패션의 성지로 거듭났다. 국내 입국 규제가 대폭 완화된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외국인 등산객도 부쩍 늘었다. 김선희 문화해설사는 “TV 예능을 통해 북한산 풍경이 해외에도 입소문이 퍼져 외국인 등산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북한산우이역 인근 서울 도심 등산관광센터에서 외국인(동반 내국인 포함)을 대상으로 등산용품을 대여해주고 있다.

북한산우이역 인근 서울 도심 등산관광센터에서 외국인(동반 내국인 포함)을 대상으로 등산용품을 대여해주고 있다.

요즘은 북한산우이역(경전철 우이신설선) 앞에 있는 서울 도심 등산관광센터가 ‘산린이(등산+어린이’)와 외국인 등산객을 맞는 허브로 통한다. 등산용품 대여 서비스(외국인 등산객과 외국인 동반 내국인 대상)를 비롯해 샤워실과 탈의실, 짐 보관 등 다양한 편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 9월 개관해 어느덧 5000명 가까운 인원이 들었다. 방문객 대부분이 20~30대 젊은 층이다.

센터에서 맞춤 산행 코스를 짜 줘 초보 등산객에겐 여러모로 얻어갈 게 많다. 꽃피는 봄에는 진달래능선,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울창한 우이령길을 추천하는 식이다. 서울 도심 등산관광센터 김민찬 매니저는 “MZ세대에게는 최고봉인 백운대보다는 30~40분 만에 오를 수 있는 영봉(604m)이 더 인기가 많다”고 귀띔했다. 비교적 힘은 덜 들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도 건지기 좋아서란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백운탐방지원센터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탐방객이 많이 보였다. 그들과 함께 산길을 올랐다. 북한산 인수봉을 마주 보는 영봉 정상, 서울 도심을 내다보는 너럭바위 위에서 그들처럼 인증사진 수십장을 찍고 내려왔다. 흘린 땀은 적었으나, 성취감이 대단했다. 미국에서 온 대럴은 “북한산만 다섯 번째”라며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쉽게 산을 탈 수 있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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