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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거부권 초읽기, 거야는 재입법 예고…양곡법 혼돈 길어진다

중앙일보

입력

양곡관리법을 사이에 두고 여ㆍ야ㆍ정이 다시 ‘극한 대치’에 돌입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초읽기에 들어갔고, 야당은 재입법을 예고했다.

29일 오후 한덕수 국무총리는 “쌀 산업의 발전과 농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 요구(거부권 행사)를 대통령께 건의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 총리는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양곡관리법 관련 당정 협의회를 마치고 나와 이같은 내용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번 개정안은 국민이 쌀을 얼마나 소비하느냐와 상관없이 농민이 초과 생산한 쌀은 정부가 다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라며 “시장 원리를 거스르는 포퓰리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 의지는 거부권 행사 쪽에 기울어 있다. 전날 국무회의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재정에 큰 손해가 난다”며 거부권 행사 필요성을 주장했고, 윤 대통령은 “존중한다. 숙고하고 결정하겠다”고 답을 했다. 이날 당정 협의를 거쳐 한 총리까지 거부권 행사를 공식 건의했다. 대통령의 최종 결정과 실행만 남은 상황이다.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한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헌정 사상 66번에 불과할 정도다. 2016년 5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상시 청문회법을 두고 거부권을 행사한 게 마지막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정부가 7년 만에 거부권 카드를 꺼내 든 건 양곡관리법 유지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 때문이다. 논란이 된 개정 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전체 생산량의 3~5%를 넘어가거나, 수확기에 쌀 가격이 평년보다 5~8% 이상 내려가면 초과 생산한 만큼의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내용이다. ‘쌀 소비 감소→재고 확대→가격 하락→농가 피해→자급률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막겠다며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정부와 국민의힘 반대를 뚫고 강행 처리를 했다.

하지만 남는 쌀을 무조건 사들이는 것만으로 쌀 초과 생산 문제를 풀 순 없다. 한 총리는 “개정안은 남아도는 쌀만 더 생산하게 하고, 부족한 작물의 자급률을 높이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쌀 소비 수요를 최대한 확대하고 고품질 쌀 생산체계를 강화하는 등 쌀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쌀 소비 감소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1990년대 말 100㎏ 안팎에 달했던 쌀 소비량은 한국인의 식습관 변화로 해마다 빠르게 줄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ERI)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54.4㎏였던 1인당 쌀 소비량은 2030년 47.1㎏으로 감소한다. 1명이 1년 동안 쌀 반 가마니 정도밖에 먹지 않는 시대가 곧 닥치지만, 재배 면적 감축 등 농가 변화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농촌경제연구원은 매년 20만t 안팎의 쌀이 남아돌 것으로 추산했다.

여기에 개정 양곡관리법까지 시행되면 쌀 초과 생산량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남는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주기 때문에 농가 스스로 재배량을 감축할 유인이 줄어서다. 농촌경제연구원은 양곡관리법이 이대로 시행되면 2030년 쌀 초과 생산량은 64만1000t에 이르고, 그해 쌀 시장 격리(시장에 풀리지 않도록 정부가 매입)에만 1조4042억원 예산이 들겠다고 전망했다. 이후에도 쌀 소비량이 더 줄고 초과 생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매년 쌀 매입에 조 단위 예산을 쏟아부어야 한다. 당정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추진하는 배경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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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보통 폐기 수순을 밟는다. 대통령의 재의 요구에 따라 국회에서 다시 의결하려면 과반수 출석,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개헌 수준으로 많은 의원을 동원해야 하는데 169석을 가진 ‘거대 야당’ 민주당이라도 재의결은 불가능에 가깝다. 과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66건 법안도 이런 이유로 모두 폐기됐다.

민주당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개정 법안을 재발의하겠단 입장을 일찌감치 내놨다. 양곡관리법을 대표 발의한 신정훈 민주당 의원은 지난 24일 “정부가 만약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쌀값을 그대로 안정화시킬 수 있는 다른 법을 또다시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농가 반발도 여전하다. 거부권 행사로 폐기가 눈앞인 기존 양곡관리법도 ‘구멍’이 많았다며 보완 입법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는 “수급 조절로만 끝나지 않도록 농업생산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전면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지난 23일 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도 “정부가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 후 중장기적 관점에서 균형 잡힌 양곡 정책 수립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양곡관리법을 둘러싼 여ㆍ야ㆍ정 대치는 장기화할 전망이다.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정치권으로서는 남은 쌀을 사들이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지만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당히 어려운 법”이라며 “식량이 모자랄 때 선택해야 할 수단(재정 투입)을 정반대 상황에서 추진한 격”이라고 짚었다. 김 교수는 이어 “미국ㆍ일본 등 선진국도 많은 농산물 품목에 대한 수급 대응책을 장기간에 걸쳐 어렵게 추진해오고 있다”며 “쉬운 방법은 없는 만큼 (거부권 행사를 계기로) 제대로 된 식량 대책 수립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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