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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국회의사당과 바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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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총리는 연설 중이다. 그런데 야당 의원들은 반대 문구 피켓을 들고 책상을 두드리며 야유를 보낸다. 그리고 국가까지 부르더니 줄줄이 퇴장해버린다. 이러면 우리는 당연히 여의도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부른 건 애국가가 아니었다. 의회승인 없이 근로자 정년을 늦추겠다는 대통령 결정에 대한 프랑스 국회의 반발이었다. 국회는 어디나 다 비슷하더라며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익숙한 것은 야유하는 풍경뿐 아니다. 부채꼴 반원형의 중심에 의장석과 발언대가 있는 공간도 우리와 비슷하다.

양당 대립구조 공간의 영국 의회
발언방식의 묘수로 원만한 진행
의사당은 건물로 번역된 민주주의
권위주의 흔적의 한국 국회의사당

공간적으로 대비되는 의사당은 도버해협 건너편에 있다. 영국 의회는 여전히 귀족의회(House of Lords)와 평민의회(House of Commons)로 나뉜다. 이들의 공간구조는 양당체제를 전제로 한다. 보수당과 노동당 의원들이 장의자 몇 줄에 마주보고 앉는다. 축구장의 응원석이 서로 마주 보고 양분되는 것과 비슷하다. 타협, 협상을 부정하고 적대성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공간구조다. 욕설이 난무하고 집기가 날아다녀야 마땅하다. 특히 평민의회는 정체성을 과시하듯 의사 진행이 어수선하고 왁자지껄하다. 각료와 당수는 연단에 팔꿈치를 괴고 삐딱한 자세로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발언하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만한 의사 진행이 이루어지는 묘수가 궁금해진다.

이 공간의 절대권력자는 의장이다. 의장은 양쪽 좌석 사이의 끝단에 앉아 질서를 유지하라고 외친다. 의장은 발언 중의 수상도 주저앉히고 무례한 발언의 의원을 퇴장시킬 수도 있다. 모든 의원은 의장을 향해서만 발언한다. 이 발언 방식이 묘수다. 다른 의원을 호칭할 때는 항상 “제가 존경하는 신사” 혹은 “숙녀”라고 삼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야 한다. 상대 당을 의장에게 정중히 고자질하는 체제라고 보면 된다. 영국이 자랑하는 전통이 가장 두텁게 깔려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평민의회 의사당은 2차대전 때 독일 폭격으로 전소했다. 여기서 처칠이 등장한다. 그는 부채꼴 평면으로 짓자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의 사각형 평행좌석 평면을 고수했다. 수시로 마음을 바꾸려는 의원을 공간이 수용하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의원은 650명인데 수용 좌석은 427석이다. 좌석 지정도 없어서 자리 못 잡은 의원들이 회의 내내 서 있는 풍경이 일상이다. 처칠은 의원에게 발언의 면책특권을 넘어 지정 좌석 특권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남긴 이야기가 유명해졌다.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건물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

이제 우리 국회의사당을 들여다볼 차례다. 1950년대 후반 신문에는 국회의사당 위치 선정 논의가 무성한데 벌써 육군 공병대는 남산 중턱을 불도저로 밀기 시작했다. 현상공모로 국회의사당 설계안을 정했는데 이번에는 종묘로 위치를 바꾼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남산에서 국회가 행정부를 내려다보는 점이 불쾌해서라고 당시 신문은 증언했다. 그러다 자리 잡은 곳이 여의도다. 외국의 의사당 지붕에는 돔이 있더라고 해서 우리도 바가지를 덮었다고 건축계에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1970년대의 권위주의적 관공서 건물 양식에 충실하다. 국회 방청 시 모자를 써도, 다리를 꼬아도 안 된다는 엄숙한 시기였다. 그답게 민주주의는 오독된 채 건축적 완성도는 없고 거대한 계단과 열주만 전면을 압도한다.

중계카메라에 비치는 의사당은 여전히 소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제 물리적 폭력으로 의사진행이 방해되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믿기 어렵게 짧은 시간에 이뤄낸 성취다. 집합적 정당정치의 수준은 소주 회식의 안줏감 수준인 건 맞다. 그러나 권위적 나으리로서의 국회의원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건물로 번역된 민주주의, 그것이 의사당의 모습이어야 한다. 한국은 가장 역동적인 민주주의 국가지만 의사당으로 읽히는 민주주의는 오로지 권위적이다. 국회의사당에서 전면 기단은 여전히 주차장으로 쓰이고 주차권리의 품계석으로 차별화를 표현한다. 헌법의 규정과 달리 여기서 국민이 권력의 주체라는 가치는 도대체 찾기 어렵다. 국회의사당이 백화점처럼 개방되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바뀐 사회를 반영해서 잘못된 건물을 계속 고쳐나가는 노력은 필요하다. 건축적으로 최악의 건물로 빠지지 않고 선정되는 이 건물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여준다고 하면 비극이거나 희극이다.

의회로 보여주는 영국 민주주의는 그들의 축구만큼 흥미롭고 건물 웨스트민스터만큼 자부심 넘친다. 젊은 정치인 리시 수낙이 수상이 되면서 의회 풍경은 훨씬 활기 있고 유쾌해졌다. 마그나 카르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에 억눌린 줄 알았던 영국 의회도 변한다. 1992년에는 역사상 첫 여성의장을 선출하고 의장이 그간 써오던 가발을 벗었다. 우리 국회의사당은 저 우스꽝스러운 지붕의 바가지라도 벗으면 좋겠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