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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응교의 가장자리

진달래 부활절, 연꽃 석가탄신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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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부활절엔 진달래 피고, 석가탄신일 이후에 연꽃이 핀다. 많은 종교가 변두리에서 탄생했다. 모든 변두리에서 진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거의 모든 진리는 변두리에서 나왔다.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북인도의 서너 개 강대국 사이의 작은 카필라국에서 자란다. 변두리 카필라국에서 싯다르타는 사랑과 죽음과 전쟁이라는 괴이쩍은 진흙탕을 체험하고,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 묘법연화(妙法蓮華)의 진리를 제시한다.

환갑을 넘긴 아버지 숙량흘과 무당일 거라는 16세의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난 공자는 불우한 소년 시절을 지낸다. 늦게 글을 익혀 열다섯에 학문을 선택한 공자는 서른 살에 공자 아카데미를 열어, 버림받은 가장자리를 극복한다.

예수와 싯다르타, 잡스와 BTS
사회 변두리에서 피어난 꽃들
소외당한 이들을 일으키는 힘

운보 김기창 화백의 성화 연작 ‘예수의 생애’ 중 부활 장면(부분). [사진 서울미술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성화 연작 ‘예수의 생애’ 중 부활 장면(부분). [사진 서울미술관]

아버지를 일찍 여읜 맹자를 어머니가 묘지와 시장, 마지막에 서당 근처에서 키웠다는 맹모삼천지교 이야기는 『열녀전』에 나온다. 묘지 근처에서 생로병사를 본 맹자는 인(仁)이 무엇인지 깨닫고, 시장에서 “골라, 골라!” 상인들의 호객 소리를 들으며 욕망이 무엇인지 체득했겠다. 머리로만 공부한 사람들과 달리, 당연히 차원이 다른 말을 할 수 있었겠다.

베들레헴 말먹이통에 누워있던 갓난아이는 “나사렛 촌구석에서 그런 인물이 나올 리 없다”는 로마군 기지촌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란다. 아버지 목수 요셉이 체포된 독립군이 사형당할 십자가 짜는 것을 보며 어린 예수의 코끝은 시큰했겠다. 로마 식민지 아래 천대받는 청년 예수는 제자들과 변두리를 유랑하고 마지막에 중심지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부활해서는 가장 가난한 변두리 갈릴리로 향한다.

1824년 경주의 변두리, 몰락한 양반집에서 서자로 태어난 최제우는 보부상으로 전국을 십여 년 떠돌며 밑바닥의 염병과 눈물을 목도한다. 돌아와 생가 맞은편 깊은 산골 용담정에서 『동경대전』을 쓴다. 그의 호소를 기억한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이야말로 변두리인의 ‘다시 개벽’이었다.

싯다르타, 공자, 맹자, 예수, 수운. 이들은 변두리 밑바닥을 처절히 기어가며 비애를 알고,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경계를 넘는 포월(匍越)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정약전은 까마득히 먼 흑산도에 유배 가서 어부 창대를 만났기에 『자산어보』라는 고전을 쓸 수 있었다. 윤동주는 명동마을이라는 변두리, 정지용은 옥천이라는 변두리에서 자기만의 시를 창조한다. 생부모에게 버림받은 입양아 스티브 잡스는 주차장에서 컴퓨터 조립하는 변두리를 거쳐 애플 르네상스를 이룬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자란 BTS 멤버들은 고독한 연습실에서 ‘온리 원(Only One)’을 겨냥하다가 ‘넘버 원’이 되었다.

물론 변두리란 꼭 지역을 뜻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주장하는 노마드는 변두리 정신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에 묶이지 말고, 탈주하여, 탈영토하여, 다시 재영토화하는 자유로운 노마드가 되라고 들뢰즈는 권한다.

변두리에는 승리자들만 있을까. 아니다. 주변인(The marginal)들은 지지리도 고독한 설움을 겪어야 한다. 탱크와 흑인 병사가 수시로 지나는 기지촌에서 어린 내 친구들은 양색시 누이들, 때로는 상냥한 미군의 웃음, 반대로 참을 수 없는 야만을 보기도 했다. 사실 변두리에는 빈궁한 구석이나 욕설 섞인 폭력이 질펀하다. 많은 폭력도 변두리에서 탄생하니, 변두리는 격렬한 용광로다.

성공한 변두리 출신에게 가려진, 셀 수 없이 많은 실패자의 비애가 변두리에 깔려있다. 삶에는 성공으로 향하는 과정이 있을 뿐 실패란 없다고 하지만, 좌절과 눈물을 경험하는 곳도 변두리다. 지리멸렬 한숨 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권이 도달하지 않는 미얀마는 민주주의의 변두리다. 아직도 구호물품 트럭이 들어갈 수 없는 튀르키예는 지구의 변두리다.

생산적인 사회는 변두리에 숨어 있는 슬픔과 역동성을 변혁의 힘으로 전환하는 사회가 아닐까. 변두리 밉상으로 취급받는 노숙인, 재소자,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작디작은 뱁새들이 기분 좋게, 으샤, 힘내는 사회야말로 역동적 사회다.

가장자리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진달래나 연꽃처럼 유명한 꽃을 기억하자는 뜻이 아니다. 라일락·루핀·작약·알리움·깽깽이풀처럼 주목받는 봄꽃에 앞서, 숫제 꽃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름도 없는 꽃이나 쓰러져 벌레에 먹히는 통나무야말로 숲을 환상의 숲답게 만든다. 국가는 변두리의 꽃들을 기억해야 한다.

4월의 진달래 부활절, 5월의 연꽃 석가탄신일은 변두리에서 태어난 진리, 변두리의 가능성을 성찰하게 한다. 아울러 소외당한 존재들의 그늘을 성찰하게 한다. 지금도 변두리에서 성취를 위해 밤잠 없이 애쓰는 꼴찌나 루저들에게 절망하지 말라며, 저 봄언덕에 이름 없는 꽃들이 저리도 당차고 푸지고 눈 아리게 흐드러진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