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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조가 있는 아침

(169)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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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김굉필(1454∼1504)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희는 밭을 가니
뒷 뫼의 엄긴 약(藥)을 언제 캐려 하나니
- 병와가곡집

난세의 벼슬은 불길과 같다

대자연에 봄이 오니 할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물을 깁고 아이는 밭을 간다. 뒷산에는 약초가 길게 자라 있는데 그건 또 언제 캔단 말인가. 농촌과 자연 속의 삶이 이러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은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었고,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1494년 남부참봉에 제수돼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497년 형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하고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 형벌을 받고 유배됐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평안도 희천에서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 갑자사화 때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난세의 벼슬살이는 뜨거운 불길과 같다. 그가 시조에서처럼 향리로 물러나 자연 속에 살았다면 신명(身命)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험난함을 현대에서도 보고 있지 않은가. 이 시조는 황희 작으로 전하는 판본도 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