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미래 속 ‘믿을 건 내 몸’이라는 믿음의 투영
과거 몸 만들기로 대표되는 보디빌딩 등 ‘몸짱 열풍’과는 결 달라
치열해지는 생존경쟁 속 근성·투쟁심 등이 신체적 본능으로 발현
넷플릭스 예능프로그램 ‘피지컬 100’이 갖은 화제를 불러 모으고 막을 내렸다. 자신이 단련한 몸을 무기로 경쟁하고 살아남는 이 원초적인 ‘단순함’에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마니아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뭘까? ‘인간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쓴 고통의 역사이자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피지컬(physical·신체 능력)만으로 우승자를 뽑는 서바이벌 예능 피지컬 100은 이 단순하지만 명쾌한 명제에서 출발한다. 참가자 100명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온갖 미션들을 수행하며 최강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한다. 그 흔한 진행자도, 패널도 없다. 대신 참가자들의 거친 숨소리와 투지, 근성만이 여과 없이 화면을 뚫고 나온다. 오로지 남성성만을 극대화한 포맷이다.
피지컬 100이 기존의 예능 문법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는 제작을 담당한 두 책임 프로듀서가 예능이 아닌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해오던 PD들이었다는 것도 꼽힌다. 장호기 PD는 MBC에서 ‘PD수첩’, ‘먹거리 X파일’을 연출했다. 인간 본성을 탐구하고 파헤치는 데 집중하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은 말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예능과 지향점이 다르다. 오락적 요소보다는 참가자의 거친 숨소리와 근육의 결을 보다 섬세하고 정밀하게 조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미묘한 차이점은 피지컬 100을 다큐 같은 예능으로 만들었고, 국내 예능 최초로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1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원초적 강함에는 호불호가 없다
참가자들의 탁월한 신체적 능력은 전 세계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피지컬 100에서 스타로 떠오른 이들의 공통점은 감히 범인(凡人)은 쫓아갈 수도 없는, 압도적인 신체적 역량을 가졌다는 것이다. 엄청난 괴력을 보여준 자동차 딜러 조진형, 왜소한 체형과 달리 초인 같은 근지구력을 보여준 산악구조대원 김민철이 대표적이다. 방송에 참여했던 봅슬레이 선수 강한(26)은 월간중앙에 “(참가자 중) 윤성빈과 더불어 각 분야의 괴물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평범해 보였다”며 “단순히 몸이 좋은 게 아니라 힘, 민첩성 등 특정 분야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들이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조명받았고, 화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도드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인 파워리프팅 선수 하제용(34)은 “내 몸이 미관상 좋은 몸이 아님에도 시청자들이 많이 좋아해주셨다”며 “특히 완력에 특화된 체형도 하나의 완성된 피지컬로 인식해주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로마 시대 콜로세움 경기처럼 이들 참가자 100명의 압도적인 몸에서 나오는 우월한 퍼포먼스(수행능력)는 시청자들에게 짜릿함을 선사했다. 피지컬 100 열풍이 불었던 이유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한 경쟁과 승부욕은 인간의 본능”이라며 “현역 보디빌더, 전직 특수부대 출신 군인, 올림픽 메달리스트 등 각 분야의 피지컬 정점들이 즐비한 참가자들은 현대판 검투사로서 우리에게 원초적인 쾌감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강함을 고도화해 산업화시킨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스포츠다. 스포츠 스타들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우월한 플레이를 통해 대중의 찬사와 사랑을 받는다. 지난 10년간 축구계를 지배했던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대표적 예다. 좁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여러 수비수를 따돌리고 골을 결정짓는 ‘GOAT(Greatest of All Time)’ 메시의 플레이는 수많은 2030세대의 새벽잠을 설치게 했다. 호날두가 2m 더 되는 높이로 뛰어올라 성공시킨 오버헤드킥은 일반인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모습이다. 2010년대 중반 이종격투기 대회 UFC를 지배했던 코너 맥그리거도 마찬가지다. 그는 당시 페더급(UFC 체급 중 하나) 챔피언이었던 조제 알도를 펀치 한 방으로 13초 만에 다운시키는 수퍼 플레이로 일약 수퍼스타 반열에 올랐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들의 퍼포먼스는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시청자들이 스타들의 수퍼 플레이에서 나오는 원초적 강함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유다. 취재 중 만난 직장인 정기석(29) 씨도 같은 사례다. 그의 우상은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다. 정 씨는 “르브론의 슬램덩크와 같은 플레이는 보기만 해도 짜릿하다”며 “강인한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인적인 퍼포먼스를 보면 피가 끓어오른다”고 말했다. 전쟁을 모티브로 투지, 근성, 승부욕을 형상화한 스포츠 문화가 강한 피지컬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 이유다. 피지컬 100은 이런 스포츠 스타들의 퍼포먼스를 엄청난 신체적 능력을 가진 참가자들의 무한 경쟁을 통해 날것으로 선보여 시청자들을 열광시킨 것이다.
특수부대발 예능에서 시작된 피지컬 열풍
피지컬 100의 성공은 우리 사회에 신체적 능력과 ‘운동’에 대한 관심을 몰고 왔다. 건강을 위해 몸을 단련하는 운동이 방송이나 영상 콘텐트로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이 크다. 집에서 운동하는 ‘홈 트레이닝’ 정보와 영상이 담긴 헬스 콘텐트가 유튜브 등을 통해 유통되고 소비되면서 몸을 잘 사용하는 전·현직 운동선수들이 각광 받기 시작했다. 강인하고도 우월한 신체에 대한 관심은 2020년 유튜브를 강타한 ‘가짜사나이’ 콘텐트가 정점을 찍는다. 유튜버 ‘피지컬갤러리’가 기획한 가짜사나이는 해군 특수전전단(UDT) 출신 간부들이 출연해 화제가 됐다. 당시 교관으로 참가했던 에이전트H(본명 황지훈)는 수려한 외모에 다부진 신체를 겸비해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또 다른 교관 이근, 로건(본명 김준영) 역시 특수부대 출신다운 신체 수행 능력을 보여주며 ‘특수부대 열풍’을 불러왔다. 가짜사나이 시리즈가 주목을 끌자 유사한 포맷의 예능이 생겨났다. 특수부대 간 경쟁을 주제로 한 예능인 ‘더 솔져스’, ‘강철부대’ 등이 속속 나왔다. 일반인을 넘어서는 신체적 능력과 정신력을 가진 특수부대 출연자들은 방송을 탈 때마다 주목 받았다. 특히 ‘강철부대’ 출연자 해난구조대(SSU) 출신 황충원은 방송 중 미션에서 80㎏ 더미를 어깨에 메고 뛰는 모습을 보여줘 ‘황장군’이란 별명까지 얻으며 ‘괴력남’으로 각인됐다.
과거 2000년대 초중반 불었던 ‘몸짱 열풍’은 외관상 큰 근육이 많은 몸을 최고의 피지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인기 트레이너 ‘숀리’를 중심으로 보디빌딩식 몸매 가꾸기가 큰 인기를 얻은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현재 불고 있는 피지컬 열풍은 그때와 다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중들이 동경하는 강함은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가 아니라 투쟁심, 근성을 끌어내는 정신력 혹은 생존과 직결된 실질적인 수행 능력이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가 피지컬 100 참가자인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장은실이다. 장은실은 두 번째 미션 ‘모래 나르기’에서 상대적으로 신체적 힘이 약한 사람들로 구성된 팀의 리더였음에도 특유의 독기와 승부욕으로 우승 후보팀을 꺾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시청자들은 그 의외성과 더불어 그가 보여준 승리를 향한 집념에 박수를 보냈다. 나아가 장은실의 남성 못지않은 폭발적인 체력과 근력은 성별을 떠나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는 평가다. 그가 팀 단위 두 번째 미션에서 아쉽게 탈락했음에도 참가자들과 대중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진 이유다.
참가자 학폭 논란, 공정성 시비는 옥에 티
우리 사회에 부는 피지컬 열풍과는 별개로 피지컬 100이 몇 가지 논란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점은 옥에 티라고 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피지컬 100 참가자 김다영은 학교폭력 구설에 올랐다. 논란이 커지면서 김다영은 결국 개인 SNS에 학교폭력 일부를 인정하는 글을 올려야 했다. 럭비 국가대표 출신 한 참가자도 여자친구를 폭행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지컬 100 애시청자인 직장인 김혜정(33) 씨는 “사람이 안 됐는데 몸만 좋아서 뭐하냐”며 “이런 사건이 계속 발생한다면 ‘운동선수는 거칠다’라는 편견이 더 굳어질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프로그램 참가자들 역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출연 멤버인 하제용은 “경연 땐 다들 페어플레이를 알아서 했던 성숙한 문화를 보여줬다”면서 “경기 외적으로 구설들이 발생해 너무 아쉽다”고 심경을 밝혔다.
해당 프로그램은 종료됐지만 최고 관심이 집중됐던 결승전 운영 방식을 놓고도 공정성 시비가 발생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대회 준 우승자 정해민이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결승전 도중 두 차례 경기가 중단됐다. 운동인이라 져도 납득이 되어야 한다”고 반발한 것이다. 결승전은 두 명의 참가자가 도르래에 감겨 있는 로프를 누가 더 빨리 풀어내느냐를 놓고 치러졌다. 정 씨는 “경기 중 상대가 ‘소리가 너무 많이 난다’며 기계 결함을 주장해 중단됐는데, 기계에 기름칠을 한 후 재개된 경기에선 제작진이 오디오 문제로 또다시 중단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정 씨는 앞서 두 번의 경기를 모두 이기고 있었지만 중단된 후 재개된 경기에서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도 지쳐버렸는지 허무하게 패배한다. 논란 이후 제작진이 공개한 로프 길이는 실제로 정씨가 상대보다 45m가량 더 풀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제작진은 중단됐다가 재경기한 사실을 편집본에서 알리지 않았고, 이는 시청자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피지컬 100 프로그램을 빠짐없이 챙겨봤다는 대학생 이상연(24) 씨는 “논란을 듣게 되니 허탈했다”며 “이런 신체 경연마저 각본에 의해 정해져 있는 거라면 누가 보겠느냐”고 말했다.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는 “다른 사회적 경쟁에 비하면 육체의 경쟁이 그나마 가장 정직하고 공정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피지컬 100에 환호한 것”이라며 공정성 논란에 아쉬워했다.
-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shineto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