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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MZ세대 사건리포트 | 사기피해 전문 천호성 변호사가 보는 전세 사기 실태

중앙일보

입력

‘빌라왕’은 바지사장, 설계자인 ‘전주(錢主)' 잡아야

부동산 활황기에 치밀하게 계획된 조직 범죄, 명의 빌려준 바지사장만 걸려들어
형량보다 변제가 중요… 피해자에 변제 않으면 가혹할 정도의 형량 선고해야

전세 사기가 다수 발생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 빌라촌.

전세 사기가 다수 발생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 빌라촌.

서울 강서구 화곡동 한 언덕에 형성된 빌라촌. 낮에는 인적이 드물고 밤이 돼야 빌라 곳곳 유리창에 불이 들어온다. 산을 깎아 조성된 동네여서 비탈길을 따라 15분은 걸어야 김승환(32·가명)씨 부부의 신혼집이 나온다.

“결혼 전에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축아파트에 입주하기는 어려워서 구축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전세 매물이 통 없어서 8개월 동안 시간만 버렸다. 그래서 결국 빌라로 마음을 바꿨다.” 김씨의 회고다. 처음에 그의 아내는 빌라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자는 말에 질색했다. 임대인이 이사 비용을 지원해주고 건물도 신축인 데다 인테리어도 괜찮다는 말로 겨우 아내를 설득했다. 하지만 6개월 뒤 ‘임대인 명의가 법인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안 돼 뉴스에선 전세 사기 조직이 활개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새 임대인은 연락 불통이었다. 문자로 보증금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김씨는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로펌을 돌아다니며 변호사의 자문을 구했다. 다른 세입자와 함께 소송에도 나섰다. 수사기관은 전 임대인과 법인이 사기를 공모했다고 보고 이들을 기소했다. 민·형사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김씨의 낯빛은 어둡다. 계약 당시 전세보증보험(HUG)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주인에게 처벌이 내려져도 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은 요원하다. 집주인 계좌를 뒤져봤지만 한 푼도 없었다.

전주(錢主)가 설계하고 명의 빌려줄 바지 물색

천호성(38) 법무법인 디스커버리 대표 변호사는 사기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천호성(38) 법무법인 디스커버리 대표 변호사는 사기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전세 사기는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범죄다. 집값이 계속 오르면 보증금도 올려 차익을 챙기면 되고, 반대의 경우엔 재산을 차명으로 세탁하고 파산하면 그만이다. 사기꾼은 절대 손해를 안 본다.” 천호성(38·법무법인 디스커버리) 변호사의 말이다. 이제 김 씨는 한 달 뒤 집을 비워야 한다. 하지만 한 차례 전세대출을 받아서 추가 대출 기회는 사실상 없다. 빌라가 경매로 넘어간다고 해서 도움이 될까? 분쟁에 휘말린 건물은 기피 대상이다. 아내와의 대화는 단절됐고, 김씨는 불면증에 걸렸다.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며 계약서를 쓰던 때만 곱씹는다.

전세 사기의 피해자는 김씨처럼 사회 초년생이 압도적으로 많다. 국토교통부가 경찰청에 수사 의뢰한 전세 사기 106건의 피해자 중 약 70%가 청년 세대다. 이 통계마저도 실제 피해 규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천 변호사는 “여타의 사기 사건과 메커니즘은 같다. 언제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타깃이다”라고 강조했다. 최근 수많은 피해자를 낳고 있는 전세 사기 실태를 듣고자 사기 피해 전문 변호사로 일하는 천 변호사를 찾았다.

이번에 사회문제화된 전세 사기 피해는 예고된 사태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3년 전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던 때 무자본 갭투자가 성행했다. 자기자본 없이 세입자의 보증금을 이용해 부동산을 늘려가는 수법이었다. 부동산 경기가 활황이면 성과가 되지만 집값이 내려가면 막아낼 길이 없다. 결국 부동산 침체기와 세입자의 계약 만기 시점이 맞물리면서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활황 국면을 악용한 계획 범죄라는 얘기인가?
“처음부터 사기 칠 생각을 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보이스피싱 조직과 같다. 총책인 ‘전주(錢主)’가 배후에 있고 명의만 대여해주는 ‘바지사장’이 있다. 그리고 리베이트(중개보수 초과)를 보장받은 ‘중개사’가 피해자에게 덫을 놓는다.”

그들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사기 조직의 범행은 거의 분양을 통해 이뤄진다. ‘전주’가 건물을 올리고 완공도 안 된 상태에서 컨설팅업체에 홍보를 맡기고 공인중개사를 통해 희생양인 세입자를 모은다. 이 과정에서 공인중개사는 HUG의 보증서가 나올 테니까 안심해도 좋다면서 이사지원비 등을 보장하며 세입자에게 계약을 재촉한다. 하지만 신축 빌라는 보증서가 잘 안 나온다. 리베이트를 챙기기 위해 속이는 것이다. 그렇게 수십 가구의 분양을 마치면 전주는 수십억 원을 챙기고 컨설팅업체와 공인중개사가 리베이트를 나눠 먹는다. 바지사장은 수수료 300만원 정도에 건물 소유권을 넘겨받는다.”

결국 바지사장만 수사를 받고 나머지는 빠져나가는 구조 아닌가?
“나중에 뒤집어쓰라고 푼돈 쥐여주는 것이다. 바지사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실상을 보라. 사태 초기만 해도 ‘빌라왕’이라 불리고 굉장한 자산가로 추정됐지만 종부세를 내지 못해 신용불량자 신세이거나 작은 빌라에 세 들어 살고 있지 않았나.”

그런 빌라왕 가운데 3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범죄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어 징역살이 대행 노릇이나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전주’나 컨설팅업체, 공인중개사는 떵떵거리며 잘산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보니 대부분 사회 초년생이 많더라.
“사기꾼들이 속이기 훨씬 쉬우니까. 부동산 계약을 해본 40·50대한테는 웬만해선 씨알도 안 먹힌다. 거기다 젊은 친구들은 빌라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파트의 경우 금액이 커지니까 사람들이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더 많이 알아보는 경향이 있다.”

다가구주택을 이용한 사기도 심각하다.
“다가구주택은 단독주택으로 표시된다. 1~3층에 총 10개 호실이 있어도 등기는 하나만 나온다. 그래서 사기를 치기 쉽다. 경매로 넘어가면 배당 순위에 따라 돈을 나눠 갖는데, 확정일자 순서에 따라서 임차인 상호 간 순서가 정해진다. 은행이 대부분 선순위다. 건물이 10억원이고 은행 빚이 5억원이라고 치면 1~5번 임차인이 1억원씩 가져가고 나머지 5명은 최우선변제권으로 배당받을 수 있는 금액을 제외하고는 돈을 못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가구건물의 선순위 임차보증금의 합계는 쉽게 확인할 수 없다.”

변제 받기 쉽지 않아… 당하지 않는 게 최우선

계약할 때 특약을 걸어두면 피해를 예방할 수 있지 않나?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특약을 걸어두더라도 이행 의무는 무시하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임대인도 많다. 실제로 한 임차인은 개인과 은행으로 근저당권 2건이 걸린 건물에 특약을 걸어 임대인과 계약했다. 잔금 일에 말소를 진행하는 게 조건이었다. 하지만 잔금을 치른 후에도 임대인은 은행의 근저당권을 말소하지 않았다. 이에 피해자가 민·형사 소송을 걸자 임대인은 ‘너한테 줄 위약금이 있으면 개XX한테 주겠다’, ‘너 같은 XX가 빨갱이 XX’ 등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였다. 재산을 은닉하면 안 돌려줘도 그만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신탁 사기는 어떤가?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조직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해당 부동산에 대한 신탁계약이 체결돼 신탁사가 소유권자로 되어 있음에도, 신탁사의 동의가 있는 것처럼 기망해 임대차계약을 체결한다. 실제로는 신탁사의 동의가 없어서 임차인이 신탁사에 대항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피해자들은 뒤늦게 신탁사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요구를 받고 경악하게 된다.”

사기를 당한 후에 소송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피해를 회복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
“솔직히 말해 피해자는 사기꾼이 징역 몇 년을 받건 별 관심이 없다. 돈을 온전히 돌려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사기꾼이 현금 뽑아서 가족 명의로 넘기고 골드바 사서 땅에 묻고 코인으로 돌리면 아무도 못 찾는다. 그리고 파산 신청해버리는 것이다. 법은 거미줄이다. 거미줄을 뚫고 지나갈 힘이 없는 잡범만 걸린다.”

사법부의 판단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 같다.
“피해자에 대한 변제 여부를 최우선 양형인자(법정형의 범위 내에서 선고형을 결정할 때 고려되는 요소)로 삼아야 한다. 돈을 갚으면 양형을 반영해주고, 변제하지 않으면 가혹할 정도로 형량을 때리면 사기꾼은 돈을 묻어둔 땅을 파서라도 갚을 것이다.”

- 글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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